25.05.28 14:45최종 업데이트 25.05.2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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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만든 'AI 판사' 이미지자료사진

통상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오역되는 SF(Science Fiction)는 '공상' 소설이 아니다. 현재까지 이뤄진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에 근거하여 앞으로 인류의 삶과 문화를 전망하는 장르다. SF의 좀 더 온당한 번역어는 과학소설이다. 인류세(Anthropocene)의 위기라 말해지는 이 시대에 인류 문명의 문제점을 외부 시각에서 살피려는 과학소설의 가치는 높아진다.

나는 기술의 사회적 파급력, 특히 고용 문제를 외면하는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발상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인공지능이 급격하게 도입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 온 감성, 지성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아래 AI)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은 공상의 영역으로만 넘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대법원의 파기환송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AI에게 재판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

사법부도 주권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조광희 <인간의 법정> 겉표지

그와 관련해 조광희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아래 <법정>)은 주목할 만하다. 소설가 조광희는 낯설다. 나는 그를 인권변호사 조광희로만 알고 있었다. 이 글이 본격 문학평론이 아니기에 작품의 미덕과 문제점을 분석하지는 않겠다. <법정>이 다루는 주제가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과 비(非)인간의 관계를 법률적 시각에서 조명한 작품은 한국문학사를 살펴봐도 드물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법정>은 인문학적 시각이 아니라 법의 관점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조명한다. 법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법정이 지닌 한계는 무엇인가? 제목은 그런 문제의식을 요약한다. 최근 상황과 관련해 <법정>에서 눈에 띄는 재판 장면이다.

윤표는 AI 판사의 얼굴을 떠올린다. 표정이 없는 AI 판사의 재판은 인간 판사의 재판보다 편안할 때가 많다. 인간 판사의 재판에서 판사가 드러내는 감정의 기복, 미묘한 편견 그리고 심판자의 자부심이 AI 판사에게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점이 AI 판사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재판은 어차피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절차다. 그 절차에서 인간적인 무엇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내란 수괴를 풀어주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제거하려 했던 사법 쿠데타를 겪으면서 나는 사법부 불신이 매우 강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AI 판사가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작중 캐릭터인 윤표가 지적하듯이 "인간 판사의 재판에서 판사가 드러내는 감정의 기복, 미묘한 편견 그리고 심판자의 자부심이 AI 판사에게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지적은 AI 판사의 한계를 짚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채 법리와 관례도 자의적 적용하거나 무시하면서, 한마디로 '법으로 정치를 하려는' 일부 판사의 행태를 보면 인간 판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기복, 미묘한 편견, 심판자의 자부심"이 내게는 더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런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헌법 정신과 판례에 근거하여 냉철한 법리적 판단을 내리는 AI 판사를 더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 전에 관련 데이터를 내가 사용하는 AI에 입력하고, 오직 법리에 근거하여 재판 결과를 예측해 달라고 했다. 글의 논리와 추론 과정을 따지는 걸 업으로 삼는 비평가로서 내가 보기에도 AI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결과는 거의 100% 상고기각(무죄 확정)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시민적 양식이나 AI의 예측과는 어긋났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누가 옳은가? 시민과 AI인가? 아니면 파기환송을 한 대법원 판사들인가?

곧 새 정부가 출범하면 할 일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사법부 개혁이다. 법률가가 아닌 나로서는 세부적인 안을 내놓을 수는 없다. 시민의 중지를 모아 개혁안을 모으고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시민이자 평론가로서 그런 개혁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을 지적할 수는 있다. 하나만 적는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는 국민(시민)이고, 행정(정부)-입법(국회)-사법(법원)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가질 뿐이다. 권력은 국민의 것이다. 권력과 권한은 다르다. 다시 말해 사법부도 주권자인 국민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헛똑똑이 법률가들은 법원의 독립, 삼권분립(三權分立)을 떠든다. 헌법 정신에 관한 초보적인 상식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와 마찬가지로 사법부도 주권자인 국민이 권한을 잠시 위임해 준 것에 불과하다. 소위 '사법부의 독립성' 운운하는 것도 행정부와 입법부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법부도 주권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사법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지금처럼 사법 쿠데타를 통해 국민 주권을 침해하는 사법부는 존재 가치가 없다. 주권자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법관 탄핵도 포함된다.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삼권분립과 국민이 위임한 권한의 상호 견제는 행정부와 입법부(국회) 사이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금처럼 사법부가 오만하게 국민 주권을 침해하면(선거는 국민 주권이 표현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국회는 결연하게 사법부를 견제해야 한다. 사법부는 고도의 독립성이 요구되지만,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게 아니다. 위임한 권한은 시민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사법 독립뿐 아니라 사법 책임도 강조한다.

시민 참여 확대하는 '사법부 개혁안' 필요한 때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입장해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대의기관인 국회가 탄핵 등의 방법으로 사법부를 견제하는 것과는 별개로,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절차를 확대해야 한다. 시민이 선거를 통해 판사를 직접 선출하는 제도도 도입을 숙고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등 일부 주는 주(state) 대법원 판사를 포함한 주요 판사를 선거로 뽑는다. 재판에 시민이 참여해 판결에 관여하는 배심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 시행 중인 국민참여재판은 미흡하다.

배심원제는 시민이 사법권을 통제하는 의미 있는 제도다. 배심원으로서 시민은 단순한 의견 제시 수준이 아니라, 직접 재판의 중요한 판단 요소에 참여하여 사법 작용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배심원은 사건의 사실관계를 판단하고, 피고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결정한다. 판사만이 재판의 주체가 되는 구조와 달리, 시민이 실질적 판단 주체로 참여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되면 판사의 자의적 판결이 어려워진다. 시민이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재판 결과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과 신뢰가 높아진다. 판사나 검사 등이 소수 엘리트 출신일 때 일반 시민의 가치관과 동떨어질 수 있다. 배심원은 이러한 불균형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의 경우 수정 헌법 제6조(형사 사건)와 제7조(민사 사건)는 시민이 배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명확히 밝힌다. 형사 사건에서는 배심원제가 원칙으로, 피고가 요청할 경우 거의 모든 중대한 형사 사건은 배심원 재판을 받는다. 12인의 시민이 평결을 내리며, 유죄 판단은 만장일치가 원칙이다. 인권보장의 정신에 따른 것이다.

민사 사건에서도 배심원제가 가능하다.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민사 사건에도 배심원이 참여할 수 있다. 영국도 전통적으로 배심원제를 운용해 왔으며 형사 사건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한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경우는 미국식 배심원제는 아니지만, 시민이 참여하는 혼합형 재판제도를 운용한다. 프랑스의 중범죄 재판은 판사와 시민 배심원이 함께 참여하여 평결을 내린다.

우리 시대 법률가의 문제를 통렬하게 지적한 비판을 적어둔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닦은 특수한 지식의 권위를 지켜 내기 위해,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가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직업적 속임수가 문외한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기고, 당대의 문명사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운영하던,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제가 존재했다." (프레드 로델,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사법 내란은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제"가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그들은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으로 시민을 현혹한다. AI 판사의 도입을 고민하자는 주장이 허황한 소리가 아니게 만들었다. 당장 AI 판사를 도입하지 못하더라도, 시민의 사법부 통제 방안을 비롯한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부응하는 사법부 개혁안을 심각하게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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