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7 17:10최종 업데이트 25.05.2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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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무의는 소셜벤처, 비영리단체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이 많은 성수동에 위치한다. 이 곳에서 열리는 상당수 행사에는 '문자통역'이 제공된다. 문자통역사가 현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타이핑하고, 참가자는 행사장 스크린, 또는 스마트 기기로 실시간 자막을 볼 수 있다. 문자통역 서비스는 특히 난청인들에게 유용하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시간 자막은 많은 이들에게 유용하다.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에이유디(AUD) 사회적협동조합(이하 AUD)이다. AUD는 Auditory Universal Design, 즉 ''청각의 유니버설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AUD가 등장한 후 '문자통역'이란 개념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직 특수교사, 난청인 당사자로 창업의 길을 걸어 온 박원진 상임이사와 지난 5월 18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청각장애인 대신 농난청인이라고 부르는 이유

박원진 AUD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박원진 AUD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홍윤희

- '청각장애인'대신 '농난청인'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농인(deaf)과 난청인(hard of hearing)을 합쳐 농난청인이라고 부른다. 청각장애인은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명칭으로 의료적 진단과 판단을 뜻하는 법적 용어다. 반면 농난청인은 의사소통방식과 당사자 정체성까지 반영한 표현이다.


농인들은 한국수화언어가 모국어이며 수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한다. 상당수 난청인들은 한국어가 모국어이자 일상언어로 문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스마트폰 메모장 등을 활용한 필담도 쓴다. 보청기를 끼고 있거나 인공와우 수술을 통해 잔존청력이 어느 정도 있는 난청인들의 경우 음성 의사소통에 입모양을 통해 소통하는 구화를 활용하기도 한다. 농맹인, 즉 시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의 경우 손을 만져 소통하는 촉수화나 잔존시력이 있는 분들의 경우 큰 활자를 활용하기도 한다.

청각장애인 자체가 부정적 단어는 아니지만 청각장애라고만 하면 그 사람이 다양한 소통 방식 중 무얼 쓰는지 알 수 없다. 농난청인이라는 단어는 소통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농인"이라고 밝혔다면, 굳이 두 번 물어보지 않아도 이 사람과 소통할 땐 수어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거다. 한국어 표준어에는 한국어와 한국수어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언어, 사용하는 소통 방식을 나타내는 건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 특수교사를 하다가 어떻게 문자통역 서비스 협동조합을 창업하게 됐나?

"문자통역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초등특수교육과) 때였다. 대학 장애학생지원센터를 통해 동기들이 장애학생도우미 형태로 수업 때 랩탑 컴퓨터로 강의 내용을 타이핑해주는 문자통역 지원을 처음 받았다. 모든 수업을 지원받진 못했지만 대필 지원을 받은 수업과 아닌 수업에서 이해도 차이가 확 날 수밖에 없었다. 문자통역의 필요성을 당사자로서 깨달았다.

졸업 후 사립학교 교사를 하면서 공립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다시 문자통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임용고사를 위한 인터넷 강의를 보려 해도 자막이 안 나와서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1-2번 들으면 이해하는데 나는 5번 이상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문자통역 (자막) 지원이 필요했지만, 장애학생 지원 개념도, 사례도 없었다.

이렇게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농난청인 당사자가 설립했다는 소셜벤처 '헤드플로'라는 기업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접했다.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이란 의미의 '소셜벤처'란 단어가 머리에 맴돌았다. 나에게 가장 절실했던 문자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모델을 만들기로 하고 한 소셜벤처 경연대회에 나갔다. 당시만 해도 창업 생각보다는 농난청인들의 어려움을 공론화하겠다는 차원이었는데 입상까지 하게 됐다.

이후 2013년 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응모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에 접어들었다. '쉐어타이핑' 서비스를 만들었고 상표권을 냈다. 초기에는 창업보육센터 등 사회적 경제에서 문자통역 서비스를 주도적으로 활용했으며 공공 부문 세미나, 포럼, 컨퍼런스 등에서도 문자통역을 많이 이용하면서 알려졌다. 네이버 같은 사기업이나 다음세대재단과 같은 중간지원조직에서도 매년 행사에서 우리 문자통역을 활용하고 있다.

2024년 우리 서비스가 어느 정도 쓰이는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서울, 경기, 인천, 강원지역에서 수어/문자통역 서비스를 이용해본 기업은 전체 기업 중 50% 이상이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의 기업이 우리 서비스를 써봤더라.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며 농난청인, 후원자, 직원 등 280여 명의 조합원이 있다. 80여 명의 문자통역사 풀을 보유하고 있다."

AUD의 문자통역이 제공되고 있다박원진 AUD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가 AUD 문자통역이 제공되는 강연 현장에서 강연 중이다.AUD사회적협동조합

- 창업동기 자체가 농난청 학생들의 교육 지원이었는데 이 문제가 아직도 심각한지?

"특수교육법에서 장애학생들에게 보조인력, 보조기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있기는 하다. AUD 설립 후 이제 웬만한 대학에서는 문자통역의 존재를 알게 됐지만 초중고교에서는 아직 잘 모르는 상황이다. 현장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고교에서는 과목을 맡고 있는 교과 교사가 문자통역사가 수업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단다. 지역에서는 문자통역사 구하기가 힘들어 난청 학생들이 문자통역 지원을 못 받는 경우도 많다.

해외의 경우 문자통역사는 CART provider (Communication Access Real-time Translation provider)라고 불리며 별도 자격증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문자통역사 양성에 대한 법적 근거도 없는 상황이고 아직 필요한 만큼의 의사소통지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재난 경보에서 소외되지 않았으면

- 농난청인이 사회에 드러나기 힘들고 지체장애 중에서도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은 장애인 이유는 무엇인가?

"농난청인 지원은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처럼 매번 인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해서 그렇다. 휠체어 이용자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경사로를 깔거나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블록처럼 한번 설치하면 어느 정도 지속이 되는 물리적 인프라와는 다르다. 물론 화상회의에서의 AI 자막 제공 등 기술을 통해 농난청인들의 삶이 상당 부분 개선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상황을 AI가 대체하기는 어렵다. 키오스크가 생겼다 해서 알바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 박 상임이사는 브라이언임팩트, 아름다운가게에서 지원하는 사회혁신가 펠로우로 뽑히기도 했다. 3년 전부터 AUD가 펠로우십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AUD는 올해 설립 11년차다. 농난청인은 의사소통의 특성상 다른 지체장애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사회에 드러나기가 조금 더 어렵다. 그래서 당사자들 중 체인지메이커들을 발굴해서 알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3년 전부터 매년 2명씩 총 6명 펠로우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사회혁신가, 연구자, 최초의 여성 농인 풋살팀 만든 분 등 다양한 이력의 농난청인 펠로우들이 있다. AUD 펠로우십에 선정되면 1년 동안 월 50만 원을 지원한다. 의사소통지원 서비스도 제공한다."

- 농난청인에 대한 사회 인식 개선 또한 AUD의 목표이기도 한데 농난청인과는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에티켓이 있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우선이다. 외국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할지 먼저 물어봐 주면 좋겠다. 농난청인이라고 생각되면 대뜸 수어로 이야기하는 청인이 있는데, 각자가 선호하는 방식이 있다. 농난청인과 소통할 땐 핸드폰 메모장 등을 열어서 소통 방식을 정하면 좋겠다. 나이가 많은 농인분들 중에는 문자를 모르는 분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농난청인은 필담으로 우선 소통 가능하다.

난청인의 경우에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굳이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입모양을 과하게 할 필요는 없다. 크게 말하는 게 좋은지 톤도 물어보고 조율한 후 의사소통을 시작하면 된다. 행사를 준비할 때 농난청인이 올 예정이라면 당사자에게 미리 물어봐서 필요한 통역 서비스 제공하면 된다. 그래서 농난청인 참가자가 있는 행사 준비 가이드를 만들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오픈되는 행사라면 수어, 문자통역을 기본으로 갖추면 좋다."

- 이렇게 민간 부문에서 소통 솔루션 제공과 인식전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새로운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는지?

"우선 전화 위주의 사회 소통 구조를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민원 서비스, 금융, 의료, 행정 등은 대부분 전화 기반 구조로 작동한다. 농난청인은 STT(음성-문자), 문자 통화, 영상 자막 기능이 없으면 전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에서는 전화통화를 할 때 RTT(실시간 텍스트 통화)와 라이브 캡션 기능이 기본 제공되는데 한국은 해당 기능이 차단되어 있다.

AUD가 지원하는 문자통역 서비스는 서울과 일부 대도시 지자체 예산이나 민간 후원에 기반해 운영된다 .대부분 주간 시간대만 제공되기 때문에, 야간이나 긴급 상황(응급실, 위기 상담 등)에선 사용할 수 없다. 수업, 병원, 상담, 회의 등 정보가 오가는 모든 공적 현장에서 공공 인프라로서 문자통역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 11년간 쉼 없이 달려 왔는데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AUD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고, 조금 더 바란다면 농난청인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농난청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이고 의사소통에 대한 사회 기본 인프라가 부실하다 보니 정책 등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본인이 농난청인임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의사소통하기가 어렵다. 함께 모여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꿈이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듣기를 다시 배우는 중인데 한국엔 농난청인이 듣기 연습을 제대로 할 만한 마땅한 앱이 없더라. 영어 앱의 경우 오픈소스 기반으로 무료 앱이 많은데… 이런 앱을 개발하기 위한 기술 지원을 알아보고 있다."

박원진 상임이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끊임없이 전체 사회에서의 농난청인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고민이 드러난다. 다음 정부에서는 그가 바라는 대로 재난 경보에서 농난청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자막·수어 알림이 생기고, 공공기관, 병원, 문화시설에 농난청인 소통을 위한 접근성 기술이 기본으로 탑재되는, '모든 사람을 잇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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