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웨코 스튜던트 70's 소울(좌) & 60's 스윙(우)
김덕래
크기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는 건 맞지만, 만년필은 재질에 따라 무게 차이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라폰이 금속과 나무를 조화롭게 빚어내는 능력면에서 발군이라면, 카웨코는 플라스틱에서 시작해 아크릴,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황동, 에보나이트 등 여러 소재를 활용하는 역량이 뛰어납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산업이든 경쟁에서 자유로운 분야는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소멸하는 업체들이 무수합니다.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온 업체들도 대단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업체의 부활은 더더욱 놀랍습니다.
한때 몽블랑, 펠리칸처럼 피스톤 필러 방식의 만년필을 만들던 카웨코가 언제부터인지 카트리지&컨버터 방식을 고수했었는데, 다시 스포츠 라인에 피스톤 필러 타입을 추가한 것도 반갑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었다는 건, 즐길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이니까요.
카웨코의 세 번째 장점은 '의외성'에 있습니다. 의외성이란 예상했던 바와 다른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풀코스 정식이 나오는 유명 맛집에 가면, 그에 걸맞게 모양새뿐 아니라 향과 맛까지 다 근사한 음식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했던 것보다 맛이 덜하면, 잔뜩 들떴던 기분이 훅 떨어지고 맙니다. 반면 간판도 내부 인테리어도 소박한 음식점에 갈 땐, 기대치가 낮아집니다. 그때 만약 기막힌 음식이 나오면 기쁨은 배가 됩니다.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카웨코는 기본적으로 외양이 아담하고, 필기시 탄력감에 영향을 미치는 펜촉 크기도 작습니다. 게다가 가격대도 타브랜드 대비 낮은 편입니다. 다분히 수납성을 강조한 브랜드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만큼, 적당히 긁힘 없이 써지기만 해도 좋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막상 펜촉을 종이에 대고 선을 그으면 기막히게 매끄러운 필기감에 놀라게 됩니다.

▲아담하지만 단단한 카웨코 스튜던트 펜촉(F)
김덕래
만년필계 부활의 아이콘은 카웨코뿐만이 아닙니다. 영국의 콘웨이 스튜어트, 이탈리아의 델타와 오마스, 미국의 에스터브룩 역시 인고의 시간을 이겨냈습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말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역경과 시련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마음의 근육을 일컫습니다. 눈앞의 어려움을 그저 어금니 꽉 깨물고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로 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평정심을 찾아가는 마음의 여정입니다. 카웨코의 내일이 오늘보다 더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X이벤트 시대, 만년필 한 자루의 힘'이란 타이틀로 인문학 특강을 했습니다. X이벤트Extreme Event는 발생 가능성이 낮아 예측 대비하기 어려우나, 일단 현실의 일이 되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오는 사회 현상을 의미합니다.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의성 산불', 듣도 보도 못한 '대대대행 체제'라는 결과를 가져온 대통령 탄핵, 국내 통신사 역사상 가장 큰 해킹 사고인 'SKT 유심 사태' 등이 다 X이벤트에 해당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너무도 강력한 이슈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해, 어지간해선 별로 놀랍지도 않은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근육을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몸의 근육을 키우려면 팔과 다리를 부단히 움직여야만 합니다.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근력이 강화됩니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날로그 필기구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입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손에 쥐고 쓰는 과정에서 사고가 유연해지고, 품은 생각이 정리됩니다. 어떤 쓸 것이든 다 좋겠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손맛을 선사하는 건 역시나 만년필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은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요. 평정을 찾고, 마음 근육 단단히 하고 싶은 당신에게 만년필을 권합니다.
▲마음 근육 단단히 하고 싶은 당신에게 만년필을 권합니다.
김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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