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3 11:58최종 업데이트 25.05.2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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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여자'가 디폴트값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질문은 '왜 여자는 광장에 서는가'를 넘어서 '왜 여자는 정치적인가'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책 <다시 만날 세계에서> 중) 책임지지 못할 저런 말을 써놓고, 자주 저 뜻을 머릿속으로 굴려 봤다. 세상이 광장에 나온 2030 여자들에 놀라고 기특해할 때, 나는 '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세상이 몰랐던(혹은 자주 잊었던), 이 '정치적인' 여자들의 기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광장을 바꾼 여자들을 만나 들은 말들을 싣는다.[기자말]
서울 안국역 인근 동덕빌딩 앞에서 열린 동덕여대 집회에 참여한 솔(활동명).김남희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는 수많은 무지개색 '프라이드 플래그'와 하늘·분홍·흰색의 '트랜스 플래그'가 나부꼈다. 남태령 대첩 이후에는 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일종의 전통처럼 굳어졌고, 전국에서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광장에서 '커밍아웃'했다.

솔(활동명·28)은 동덕여대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에 연대하는 MTF 트랜스젠더(출생 시 남성으로 지정됐지만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 여성)이다. 내란 국면의 광장에서, 그는 학내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다가 해임된 지혜복 교사에 연대하는 집회, 세종호텔·한화오션 농성장 등 크고 작은 집회에만 50여 차례 나갔다. '헤비메탈은 중금속이다' 깃발의 기수이며, 여러 동지들과 '메탈 저항'이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제작한 '말벌 동지'이기도 하다.


지난 20일, 그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지방에서 살다가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직장 찾아서 서울로 올라온 보통 사람입니다."

계엄은 그에게 실체가 뚜렷한 공포였다

솔이 광장의 말벌 동지들과 함께 제작한 '메탈 저항' 머리띠

솔은 대전과 충남 천안, 논산 등 충청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현재는 서울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지난달 4일, 파면 선고를 듣고서 든 생각은 "다행이다"였다. 전날 밤 안국역 앞 광장에서 밤을 꼬박 지새우고 회사로 바로 출근했던 그는,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던 찰나 소식을 들었다.

"사실 그 기간(내란 국면) 내내 불안이랑 공포랑 같이 살고 있었던 거잖아요. 당일 날에도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공포가 있었는데, 이제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일단락을 지어줄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하는 게 제일 컸죠."

2024년 12월 3일, 계엄에의 공포가 급습하던 밤을 그는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경기 파주에서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카페에서 한가로이 각자 일을 하고 있던 그때, 애인 가족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한 마디가 떴다. "계엄이니까 집에 빨리 들어와라"는 어머니의 말.

"제가 애인에게 처음 물어봤던 게 '혹시 너 뭐 잘못했어?'였어요. 진짜 계엄이라고 생각을 못 하고, 시트콤처럼 부모님이 '가내 계엄' 같은 걸 한 게 아닐까…"

급히 인터넷에 서치를 해보니, 정말로 계엄이었다. 급히 차를 몰아 서울로 향했다. 애인을 먼저 데려다주고, 강변북로를 타고 내려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울 지나 인천이었다. 갈림길을 두 번이나 그냥 지나칠 만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달달 떨리고, 힘이 안 들어갔어요. 영화 <서울의 봄> 같은 거 보면 계엄하면서 서울도 봉쇄하고 그러잖아요. '서울로 갔다가 봉쇄가 돼서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같은 별별 생각들이 다 들면서 너무 무서운 거예요."

솔에게는 그만큼 계엄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리라는 감각이 강렬했다. 그것은 실체가 뚜렷한 공포였다.

"계엄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국가가 목적하는 바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삼청교육대처럼 규정하고 분류해서 자기 마음대로 처분을 해버리는 거. 그런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감각이 되게 선명했어요. 재작년에 광복절 경축사에서 '종북, 공산주의 세력들은 인권활동가의 탈을 쓰고 온다'는 식의 발언을 했던 사람이 계엄을 일으켰는데, 계엄 하에서 제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하나도 없는 거죠."

출퇴근하듯 드나든 광장,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서울 광화문 앞 광장에 등장한 솔의 깃발들.솔 제공

계엄 이후 첫 주말 집회였던 지난해 12월 7일 이후로, 솔은 내리 사흘간을 새벽녘이면 국회 앞으로 나갔다. 집에서는 답답해서 도통 일이 되지 않아, 밤마다 뛰쳐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존적으로 위협한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표결 안 하겠다고 나가고…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에도, 이렇게 힘 싸움을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게 어이가 없고 화가 났어요."

시작은 분노였지만, 계속해서 나오게 된 것은 국회 앞을 지키던 다른 이들 때문이었다. 새벽에도 국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10·20·30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국회의 입구마다 무리를 지어 앉아서, 정기적으로 순찰도 하고 무전도 하면서 상황을 체크했다. 솔은 새벽에도 하는 마트에 들러 과자를 사서 나누며, 회사로 출근하고 국회로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는, 발목을 다쳐 직접 참여를 못 했던 '남태령'을 제외하면 엄동설한에 윤석열의 체포를 촉구한 한강진 집회다. 이른바 '키세스 시위대'라고 일컬어지던 이들의 집회에서, 솔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한 장면은 남성 수도회인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개방한 '성 중립 화장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트랜스 여성의 여자 화장실 출입이 자주 '논란' 거리가 되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성 중립 화장실을 이용하겠다고 나선 여성들과 만났기 때문이다.

"저도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갔는데… 제가 젠더를 여쭤본 게 아니니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누가 봐도 시스젠더(지정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여성처럼 보이는 분들이 적잖이 서 계셨거든요. 그분들도 굳이 '성 중립 화장실을 쓰겠다'면서 이용을 하셨는데, 저는 거기에 좀 뭔가 많이 '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연대를 받는 느낌이 드는 거죠, 당사자(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이 어떤 집단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한다는 게, 당사자한테는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제가 받음으로써 느꼈어요."

그가 '헤비메탈도 중금속이다'라는 깃발을 제작해 광장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바로 그날 마주한 여성들 덕이었다. 그는 1월 31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농성장에서부터 그 깃발을 들고나왔다. 중화권 록 마니아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극우 집회들에서 불거져 나오는 '혐중'에 대항하는 의미에서였다.

"중국어로 '헤비메탈'을 '중금속 음악'이라고 하거든요. 깃발을 뽑을 때쯤 해서 '탄핵 집회에 중국인들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로 중국계·중국인 분들을 공격하는 일이 많았었는데요. 때마침 제가 자주 좋아하고 듣는 게 중화권 음악이기도 하고, 제가 그때(한강진 집회) 받았던 것처럼,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집단에 대해 지지를 하자는 생각으로 대놓고 한자를 크게 넣은 거예요."

광장에서 그들은 '아는 사람'이 됐다

솔(활동명)이 윤석열 퇴진 광장에 들고 나갔던 깃발과 집회 굿즈들.이슬기

솔은 지난해 12월 27일부터 동덕여대 집회에 다섯 차례 참가했다. 그에게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은 '페미니스트로서 당연히' 연대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혹여 트랜스젠더로 조명을 받게 되면 투쟁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참가가 저어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공식적으로 외부인 참여가 가능하다고 알려진 12월 27일의 혜화역 집회에 처음 나갔다. 발목을 절뚝이면서도 갈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지만, 트랜스 배제적 입장인 '랟펨'(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존재를 상기하며 혹여나 성 정체성이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집회 이후로, 솔은 어떤 '가능성'을 봤다.

"집에 와서 저 말고도 다른 트랜스 분들도 참여를 많이 하셨다는 내용들을 봤어요. 어떤 분은 트랜스 상징을 가지고 참여를 하셨는데도, 공격을 받거나 적대적인 건 느끼지 못했다는 후기를 남기셨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저도 '공격받지 않고 참여를 할 수 있겠다'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아무튼 여성 사회 안에서는 크게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동료 여성주의자로도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충돌하는 부분에선 충돌을 하더라도, 좀 '흐린눈' 하면서 느슨하게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여러 번 참가한 후로는, 국회 앞을 꼬박 지키던 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동덕여대 투쟁 당사자들이 아는 얼굴이 되어버려서, 외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참여를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까, 주최 측도 알게 되고 학생들도 알게 되잖아요. 동덕여대 집회에서도 그렇고, 다른 현장에서도 만나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누게도 되고요. 그러다 보니 시위 당사자들이 개인적인 관계로 들어오게 되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참가를 해야 겠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자주 나가다 보니 내 일도 아닌데 내 일처럼 느끼게 되더라고요."

"남성이라는 성별과 스스로를 동치시킬 수 없다는 감각"

탄핵 광장에서는 스스로를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소개하는 퀴어들이 많았다. 논바이너리는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 솔은 'X'에 "나는 어쩌다 바이너리 트랜스가 됐지?"로 시작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가 가진 성 정체성에 관한 의문은, 남성이라는 성별과 불화하는 감각에서부터 왔다.

"설명하는 게 항상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은데, 저 같은 경우는 남성 집단, 남성이라는 성별과 저를 동치시킬 수 없는 감각을 갖게 돼버렸어요. 어릴 때 남성으로서 기능할 것을 기대받고 그렇게 양육을 받았지만, 자라면서 지속적으로 남성으로 호명되거나 남성으로 집단화되고 분류되는 것들이 맞지 않는다는 기분을 느꼈거든요. 그런 위화감이랑 이질감이 제일 컸어요."

성 정체성과 관련된 위화감이란 그가 일상에서 연속적으로 겪는 일이었다. 남성 호모 소셜(Homo social·동성 사회성)이 향유하는 문화나, 사고방식에 대한 이질감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여성들을 성애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거나, 그들을 손쉽게 물화해서 바라보는 것, 젠더 간 위계나 성 역할 등을 손쉽게 분류하고 그걸 진리인 것처럼 따르는 분위기 같은 것"이라고 그는 부연했다.

오랜 고민 끝 그는 고등학생 때 안드로진(성별 이분법을 거부하는 행동 양식인 젠더퀴어 중 흔히 '중성'으로 불리는 성별 정체성)으로 정체화를 했다.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식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3년 전부터의 일이다.

"처음에 사실 여성으로 정체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먼저 안드로진으로 정체화를 했고, 호르몬 치료를 MTF가 아니라 젠더퀴어로서 진행을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읽히는 삶을 살게 되고,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이 쌓였어요. 예전에 남성으로서 여겨지고, 남성으로 사회생활을 했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 돼버린 거죠. 그때쯤 스스로를 걸플럭스(girlflux·대체로 여성이라고 느끼지만 때에 따라 강도가 바뀜)로 정체화했고, 그 뒤로는 젠더에 대해 고민하거나 특별한 의식을 갖지 않고 살았어요. 나중 가서는 그냥 '나는 여성으로 읽히는 몸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스스로를 여성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네, 그러면 바이너리 트랜스 여성인건가 보다' 라고 여기게 됐어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정치를 꿈꾼다

내란 국면의 광장에서 2030 여성이 광장에 주축이 된 것은 그들이 사회적 약자이자, 계엄의 가장 직접적인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솔은 말한다.

"계엄 당일 제가 느꼈던 것처럼, 사회에서 여성들이 약자잖아요. 계엄은 자신의 강함을 근거로 해서 '방해되는 집단을 조직적으로 청소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거고요. 그래서 계엄이 일어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진 집단이 여성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세대의 여성들은 교육을 받기로는 '평등하다'는 얘길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걸 느꼈고 거기에 순응하지 않기로 한 세대들이잖아요. 계엄도 그것의 연장선으로 보고,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겠다는 게 체화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성소수자들이 광장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맥락 또한 이와 비슷하다. 그들이 스스로를 적극 가시화할 수 있었던 것은 광장의 포용적인 분위기 때문일 것이라고 솔은 짐작한다.

"퀴어라는 집단이, 결국 계엄의 칼끝이 향할 것이 분명한 집단 중 하나니까 '저항을 하든가, 유린을 당하든가'라는 선택지 안에서 광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수적으로 적지 않았을 것이고요. '알아두겠다'거나 '괜찮다, 문제 없다'라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서, '이 자리는 (퀴어임을) 밝혀도 괜찮은 공간이구나' 라는 감각을 많이 느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다 같이 기능을 해서 발언할 수 있는 토양을 형성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바라는 파면 이후의 정치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환경을 만드는 정치'다.

"가장 근본적으로 돼야 하는 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여성혐오라는 것도 여성을 동료 시민이 아니고 감정적이고 이성이 결여된, 뭣 모르는 이등 시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고요. 성소수자도 '이상한 사람들' '변태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죠. 서로를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타협안을 내놓는 식으로 한 발씩 발전을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서로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는 게 제일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고요. 정치가 이게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봐요."

지난 3월 17일 광화문 앞 집회에 참여한 솔(활동명).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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