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4 19:18최종 업데이트 25.05.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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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지금보다 격했던 시기는 해방 직후다.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고하 송진우 등의 비극에서 나타나듯이 이 시기의 갈등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구 10월항쟁,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그 외의 민간인 학살 등에서는 수많은 대중이 희생됐다. 대한민국은 이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그 정도로 그 상처는 컸다.

희생자가 특히 많았던 것은 중립적인 공권력의 부재에도 기인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중재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한쪽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공권력의 이런 태도로 인해 저항의 수준은 한층 높아지고, 공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규모도 그만큼 커졌다.


희생자가 주로 저항자 대열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정치적 갈등과 거리를 둔 사람들에게서 훨씬 많이 나왔다. 일례로, 여순사건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여순항쟁을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충돌 및 이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으로 정의한다. 무력충돌에 참여한 저항세력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도 뜻밖의 희생을 당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다

손양원 목사KBS 역사저널 유튜브 캡처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1902~1950) 목사는 다소 특별한 경로로 참변을 겪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항쟁(여순사건)으로 인해 그는 순천에서 학교를 다니던 손동인·손동신 두 아들을 잃었다. 두 아들은 저항자나 진압군은 아니었다. 이들은 저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74년 12월 3일 자 <경향신문> '종교백년' 제80회는 이렇게 서술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동신 군이 좌익계 학생들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안재선이란 좌익계 학생이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했으나, 이 두 형제는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다가 차례로 숨졌다. 10월 21일의 일이다."

여순항쟁은 4·3과 마찬가지로 민족분단을 거부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 친미세력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기독교인들을 희생시킨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이 일을 대하는 손양원의 반응은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전기작가 오병학의 <손양원>은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경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리 내 아들들을 죽인 원수라 해도 나의 동족이요 골육이 아닌가. 이런 어지러운 국난을 만나서 그도 별수 없이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런 판국에 서로 복수한답시고 이놈 잡아 죽이고 저놈 잡아 죽이는 일에만 팔려 다닌다면 도대체 우리 동포 가운데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순천의 한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손양원>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다.

"존경하는 나덕환 목사님께, 제 결심을 딸 동희가 나 목사님께 잘 전해드릴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잠깐 스쳐 가는 감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혹 군경들의 손에 제 두 아들을 죽인 자가 잡히고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면, 부탁하오니 우선 나 목사님께서 그가 사형당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뒷일은 모두 제가 결심한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런 결심은 추후라 해도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애양원에서 손양원 드림."

손양원의 청을 받은 나덕환은 군사법정에 가서 손동인·손동선을 죽이는 데 가담한 안재선이라는 학생을 찾아냈다. 나덕환은 손양원의 편지를 제시하고 손동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재판부를 간신히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안재선을 처형 직전에 구해냈다. 안재선을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낸 손양원은 그의 양아버지가 됐다.

손양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픔을 무조건 수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기질 때문에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것은 아니다. 그는 현실에 대한 도전 정신이 매우 강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제 침략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이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했다.

신사참배 거부하고, '일왕 숭배하지 말라' 설교도

2015년 10월 20일 경남 함안군 칠원읍의 손양원 생가터에서 열린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기념관 개관식'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장신논단> 2014년 제46권 제4호에 실린 김도일 장로회신학대 교수의 논문 '손양원의 삶으로 본 사회적 신앙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 고찰'에 따르면,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한 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5세 때 신사참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가 복학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밤중에 만두 장사를 하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3·1운동 경력 때문에 쫓겨났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7권은 아버지 손종일이 경남 함안의 3·1운동을 주도한 일을 서술하면서, 손종일이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에 달고 하늘 높이 치켜든 채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렬을 이끈 일을 소개한다. 이 일로 인해 손종일은 1919년 5월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공소기각결정을 받았다.

1920년에 중동학교에서 쫓겨난 손양원은 그 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면서 도쿄 스가모중학교에 다녔다. 스무 살 전후인 이때, 그는 일본 종교의 한국 침략이라는 시대 흐름을 정면으로 거역했다. 위 논문은 그가 도쿄 길거리에서 "북을 메고 거리를 다니며 예수를 전하였다"라고 알려준다. 또 일본인들의 신앙이 깃든 공동묘지에도 가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숲속이나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 내어 기도하기도 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일본불교와 신도가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해 한반도 곳곳을 파고들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서양 선교사도 아닌 한국 청년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거리를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 다소 기행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매우 대담한 행동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가 객기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대한 태도로도 반영된다. 일제의 압박하에서 수많은 종교인들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을 받아들이던 때에 그는 불굴의 신념을 갖고 정면으로 항거했다.

21세 때 스가모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정양순과 결혼한 뒤 경남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전도사가 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37세 나이로 나환자 교회인 애양원교회의 목사가 됐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회를 운영하기 힘든 이 시절,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공개적으로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년에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평양신사를 합동 참배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신사참배 거부는 일제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주류 세력과도 맞서는 일이었다. 그것은 투사가 되는 길이자 왕따가 되는 길이었다. 이런 속에서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왕을 숭배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설교했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소식에 경악한 손양원은 애양원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수없이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 여수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11월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43년 10월 청주보호교도소에 감금,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석방된다."

손양원은 강인한 사람이자 따스한 사람이었다. 일제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는 단호한 행보와 더불어, 소외된 이들에게 애정을 베푸는 헌신적인 행보도 함께 걸었다. 나환자들의 친구가 된 그는 친구들이 해주는 음식도 맛있게 먹었다. 위 논문에 소개된 일화다.

"한번은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 순경들의 핍박으로 너무나 지치고 고단한 그가 배가 고파서 나환자 김수남의 집을 지나면서 '수남아 밥 좀 있냐'라고 물었고, 김수남은 개울가에 가서 돌미나리를 뜯어다 된장에 무쳐 보리밥과 함께 대접하였다. 손양원은 아주 맛있게 밥을 먹던 중 '수남아, 네가 해준 밥이라 참 맛있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수남은 나환자인 자신의 손으로 무쳐준 나물과 밥을 맛있게 먹어준 것에 너무 감격하였다고 한다. 그 김수남의 발에 고름이 나서 상처가 깊은 것을 보고 손양원은 자신의 입으로다 피고름을 다 빨아냈다."

손양원은 일왕은 밀어내고 나환자들은 끌어안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투쟁정신과 사랑이 빛을 발했다.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용감히 맞서고, 사랑으로 대해야 할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해방공간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기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가슴으로 품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랑과 용서와 포용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이런 방법론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각각의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큰어른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봤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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