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0일 경남 함안군 칠원읍의 손양원 생가터에서 열린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기념관 개관식'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장신논단> 2014년 제46권 제4호에 실린 김도일 장로회신학대 교수의 논문 '손양원의 삶으로 본 사회적 신앙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 고찰'에 따르면,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한 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5세 때 신사참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가 복학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밤중에 만두 장사를 하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3·1운동 경력 때문에 쫓겨났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7권은 아버지 손종일이 경남 함안의 3·1운동을 주도한 일을 서술하면서, 손종일이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에 달고 하늘 높이 치켜든 채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렬을 이끈 일을 소개한다. 이 일로 인해 손종일은 1919년 5월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공소기각결정을 받았다.
1920년에 중동학교에서 쫓겨난 손양원은 그 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면서 도쿄 스가모중학교에 다녔다. 스무 살 전후인 이때, 그는 일본 종교의 한국 침략이라는 시대 흐름을 정면으로 거역했다. 위 논문은 그가 도쿄 길거리에서 "북을 메고 거리를 다니며 예수를 전하였다"라고 알려준다. 또 일본인들의 신앙이 깃든 공동묘지에도 가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숲속이나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 내어 기도하기도 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일본불교와 신도가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해 한반도 곳곳을 파고들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서양 선교사도 아닌 한국 청년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거리를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 다소 기행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매우 대담한 행동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가 객기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점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대한 태도로도 반영된다. 일제의 압박하에서 수많은 종교인들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을 받아들이던 때에 그는 불굴의 신념을 갖고 정면으로 항거했다.
21세 때 스가모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정양순과 결혼한 뒤 경남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전도사가 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37세 나이로 나환자 교회인 애양원교회의 목사가 됐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회를 운영하기 힘든 이 시절,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공개적으로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년에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평양신사를 합동 참배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신사참배 거부는 일제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주류 세력과도 맞서는 일이었다. 그것은 투사가 되는 길이자 왕따가 되는 길이었다. 이런 속에서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왕을 숭배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설교했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소식에 경악한 손양원은 애양원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수없이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 여수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11월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43년 10월 청주보호교도소에 감금,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석방된다."
손양원은 강인한 사람이자 따스한 사람이었다. 일제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는 단호한 행보와 더불어, 소외된 이들에게 애정을 베푸는 헌신적인 행보도 함께 걸었다. 나환자들의 친구가 된 그는 친구들이 해주는 음식도 맛있게 먹었다. 위 논문에 소개된 일화다.
"한번은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 순경들의 핍박으로 너무나 지치고 고단한 그가 배가 고파서 나환자 김수남의 집을 지나면서 '수남아 밥 좀 있냐'라고 물었고, 김수남은 개울가에 가서 돌미나리를 뜯어다 된장에 무쳐 보리밥과 함께 대접하였다. 손양원은 아주 맛있게 밥을 먹던 중 '수남아, 네가 해준 밥이라 참 맛있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수남은 나환자인 자신의 손으로 무쳐준 나물과 밥을 맛있게 먹어준 것에 너무 감격하였다고 한다. 그 김수남의 발에 고름이 나서 상처가 깊은 것을 보고 손양원은 자신의 입으로다 피고름을 다 빨아냈다."
손양원은 일왕은 밀어내고 나환자들은 끌어안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투쟁정신과 사랑이 빛을 발했다.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용감히 맞서고, 사랑으로 대해야 할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해방공간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기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가슴으로 품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랑과 용서와 포용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이런 방법론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각각의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큰어른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봤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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