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3 07:01최종 업데이트 25.05.2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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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인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시작한 2025년의 대한민국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획 '넥스트 대한민국'을 통해 조기 대선 상황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남은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해 새 정부 출범을 앞둔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편집자말]
10일 공개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대선 출마 선언 영상을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보고 있다.남소연

대선 국면, 정치권에서 '성장'에 대한 약속이 넘쳐나고 있다. '중도 보수'를 내세우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중원'을 점유하겠다면서 '먹사니즘', '잘사니즘'을 이끌고 갈 수 있는 'K-이니셔티브 위원회'를 후보 직속으로 배치하고 신성장 전략에 대해 연일 공약을 내놓고 있다.

100조 투자를 통해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노린다. 디지털 전환(DX)과 인공지능 전환(AX) 가속화로 추진력이 떨어진 반도체, 이차전지 외에도 다양한 제조업 생태계 전환과 혁신을 이끌겠다고 한다. 첨단 전략산업을 위한 대규모 펀드도 조성한다고 한다. 국내 생산 촉진을 위한 세제 개편도 제시했다. '풀 패키지' 산업정책이다.


산업정책의 시대가 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장기적 투자보다는 중단기 투자를 반복하는 민간 금융보다 정부의 인내 자본이 국가의 활력을 키울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비어 있는 것은 혁신의 시대를 살아갈 노동자들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70만 개의 일자리가 AI로 대체 가능하다고 한다.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자리'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최대로 산정된 숫자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동화, 로봇, AI와 일자리 대체에 대한 논의가 그래왔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이 기술 혁신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함께 '사람의 자리'에 대한 꼼꼼한 검토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의 자리', 즉 전환기 노동 문제에 대해서 어떤 비어 있는 이야기들을 채워야 하는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동남권에서 비판적으로 경제 지리와 제조업 혁신을 다루는 연구자 관점에서 4가지를 제시해 보려 한다.

변함없이 열악한 제조업 노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선업계는 주력 제품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가 연일 이어지고 있고, 대형 조선3사는 길고 긴 불황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방위산업, 북극항로 개척 등 혁신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미래 먹거리에도 근접한 상황이다.

설계, 물류, 기자재, 인력 정보를 통합하는 스마트 조선소 프로젝트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술 혁신이 기대대로 전개되면 물리적 작업 공간을 온라인에 구축하고, 온라인에 구축된 공정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면서 작업 공간에 피드백할 수 있는 '디지털 트윈'도 구현될 전망이다. 스마트 조선소가 구현되면 생산성은 물론, 노동자들의 안전도 일정 수준까지 개선될 것이다. 그럼에도 업계는 생산직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2010년대 중반 해양플랜트를 건조하던 시절 20만 명에 이르던 업계의 노동자 수는 2022년쯤에는 9만 명에 채 미치지 못했다. 많은 용접 노동자가 경기도 평택 반도체 공장이나 화학플랜트 공장으로 향했고, 사무직은 다른 업계로 전직하는 경우가 잦았다. 남은 노동자들의 임금은 연봉의 600%에 달하는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산입을 계기로 줄어들었고, 원청 정규직 노동자와 사내하청 본공(업체의 상용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벌어져갔다.

수주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업계는 사내하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으나, 처우 개선은 더뎠다. 2022년 여름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조(거제·통영·고성 하청노동자 지회) 파업을 계기로 정부와 업계(원하청), 학계가 모여 '조선업 상생협의체'를 만들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특히 원하청 임금격차를 줄이겠다고 포부를 밝혔으나 하청노동자 임금 체불 방지를 위한 에스크로 도입 정도를 제외하면 이주노동자(E-7, E-9) 확대와 이를 위한 지원으로 그치고 말았다. 노사정 3자 대화의 중요한 주체인 노동조합은 애초에 협의체 참여가 불발됐다.

여전히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숙련이 호봉으로도 직무급으로도 반영되지 않아 임금이 제자리걸음이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조선소를 기회만 되면 떠나려 한다. 게다가 단가를 결정하는 원청과 교섭할 방법이 없는 하청 노동자는 적정한 처우를 요구할 채널이 없기에 철탑 농성 같은 극한투쟁 밖에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숙련공들은 사내 하청업체의 본공으로 '안정적 소득'과 4대 보험 대신, 당일치기로 높은 일당을 주는 '물량팀'을 선호한다.

생산직 노동자의 손끝 숙련이 핵심적인 조선업계는 핵심 인력이 일자리를 찾아 동남권 전체와 경기도 전체를 유동하게 만든다. 청년들은 원청 정규직이라면 몰라도, 하청이라면 '내일 채움 공제' 같은 조건에는 응하지 않는다. 배는 누가 지을 것인가.

2022년 7월 19일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에서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소속 조합원이 독에서 농성하고 있다.정영현

지역의 여성 노동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수도권 지역 인구 유출 문제의 핵심은 여성 일자리다. 비수도권 중소도시와 농촌은 대학을 나온 여성의 경력을 만들 수 있는 일자리가 공공부문, 소수 전문직으로 극도로 제한된다. '취업 준비'를 해 '정규직'이 되어 정년까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없다. 정규직을 뽑지 않는 제조업체의 형편을 보면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에게는 제조업 정규직의 가능성도 희소하다. 사무직과 연구직, 생산직 구분이 없다.

수도권의 여성 노동 문제가 '경력 단절'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라면, 비수도권의 여성 노동 문제의 핵심은 여성을 '경력 봉쇄'시키는 일자리 구조를 어떻게 전환시킬 것이냐 문제다. 비수도권에는 '커리어' 트랙(내부노동시장의 승진할 수 있는 정규직과 외부노동시장의 전문성을 근거로 경력을 쌓고 인정을 통해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일자리) 여성 일자리가 없다.

서울(수도권)로 향하지 않고 지역에 잔류한 여성들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수도권은 전문직, 돌봄에 기반을 둔 사회서비스 노동자(핑크 칼라 노동자), 제조업 생산직 모두 수도권에 비해 임금이 낮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는 지역별 최저임금을 차등 지급하자고 하는데, 지역별 최저임금 차등이 적용되면 각 지자체가 내부 협약을 통해 청년을 유인할 수 있게 임금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산성'이다. 제조 대기업 사업장을 제외하면 절대다수의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이 영세하고 생산성이 낮은 비수도권에서 특정 지역의 최저임금 인상 의향은 영세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중소 제조업체, 서비스 산업 전체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기조에서 아무리 주거비·생활비가 저렴하더라도 임금을 높여줄 '여력'이 있는 수도권으로 여성들이 향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실제로 매년 비수도권 지자체에서 전체 인구 유출의 70%를 청년이 주도하고, 그중 70%가 여성인 것은 비수도권의 낮은 생산성과 낮은 임금 조합과 연결되어 있다.

이 와중에 그나마 유연하고 나은 일자리를 찾아 여성들도 물류센터 업무를 하기도 하고, '3.3%' 세금을 떼는 다양한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국가의 공간적 불균등, 지역 노동시장의 나쁜 처우, 제조업의 성별화된 고용 관행에서 비롯된 지역의 성별화된 노동시장이 여성들에게 삼중고를 안기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 역시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해 교섭력이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역 여성 노동시장 문제는 정치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최저임금 차등화나 산업 정책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 속에서 사라진 '사람의 자리' 찾아주기

2023년 4월 13일 민주노총과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주 69시간제 안 폐지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의 과로사 위험과 작업장 안전사고를 늘어나게 하는 개악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희훈

문재인 정부 시절 자주 언급되던 말은 "사람이 먼저다"였다. '소득주도 성장'(임금소득자와 자영업자의 소득 인상을 통한 내수 기반 성장) 구호와 함께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주52시간 도입', '중대재해처벌법' 등의 정책이 입법과 정부의 의사결정으로 도입됐다.

대체로 진보적 구호로 제시되고, 조정되어야 할 갈등은 충분히 숙의 속에서 해소되지 못했고, 52시간제처럼 정착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처럼 여전히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인국공 사태'(인천공항공사 시설직 정규직 전환)처럼 더 큰 사회적 갈등으로 남는 경우도 있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들이 많은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69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겠다면서 노동자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제약하고, 반도체 업계도 '52시간 예외' 카드를 제시하며 노동권을 가장 만만한 권한으로 본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번 대선, 주 4일제와 주4.5일제가 쟁점이 된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물론 총 노동시간이 줄고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여전히 과로하는 사회로 분류되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시간은 더욱 줄어야 하고 일하는 날짜도 그러한 기조 가운데 줄어야 한다. 노동시간이 줄 때 임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생산성'에 대한 양적 평가뿐 아니라 질적 평가에 대해 다시금 따져봐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 4일제와 주 4.5일제를 적용했을 때 가장 적용이 어렵거나, 적용이 무력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제조업의 생산직 노동과 지방에서의 (사회) 서비스 분야 여성 노동일 것이다.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납기'와 '원가'에 결박되어 있는 수출산업에 종사한다. 제조업체의 '생산성'을 얼마나 사회적 논의가 제약할 수 있을까.

여성의 서비스 노동은 임금 수준과 상관없이 많은 경우 이미 충분히 유연화되어 있고 노동시간이 쟁점이 아닌, 저임금에 적응되어 있는 사회적 지불 수준을 어떻게 높이냐와 연동된다. 자칫 이 문제를 간과할 경우 4일제 노동이 고학력자이거나 자격증과 교섭력에 의해 보장되는 '양질의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만 선물이 될 수 있다. 노동자의 안전, 건강, 보건 역시 사회적 불평등 해소의 관점에서 함께 살펴야 한다.

사회적 혁신과 성장을 다시 이야기하려면, 기술 혁신 뒤에 가려진 노동자의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제조업 현장과 지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노동자가 없는 혁신은 결국 실패한다. 정치권과 차기 정부는 혁신과 성장이라는 화려한 말 뒤에 가려진 '사람의 자리'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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