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약국에 의약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약값 인하 계획을 발표하면서 처방약과 의약품 비용을 30%에서 80%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 후속 조치로 '최혜국 약가 정책(Most Favored Nation Pricing)'의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미국 보건복지부(HHS)는 특허 등 독점이 유지되고 있는 신약에 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인당 GDP가 미국의 60% 이상인 국가들이 지불하는 최저 가격 수준으로 미국 약가를 낮추겠다고 밝혔다.
HHS가 발표한 GDP 기준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룩셈부르크, 스위스, 아일랜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캐나다, 호주 등이 비교 대상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 이탈리아, 한국, 일본 등은 제외된다.
행정명령에 따르면, 제약사들은 30일 이내에 정부가 설정한 '목표 약가'에 대한 자발적 인하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만약 진전이 없을 경우, 정부는 규칙 제정과 강제 조치에 돌입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른 선진국으로부터 의약품 수입하는 병행수입 허용, 의약품 및 원료 수출 제한 등의 추가 조치도 포함된다.
이 정책은 트럼프의 첫 임기 때도 시도됐지만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트럼프와 제약산업의 충돌은 극한 대립이 될 우려가 있다. 제약기업들이 단체로 트럼프 정책에 반발하여 엄청난 규모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에 단체로 의약품 공급을 철회하는 식의 대응도 가능하다. 물론 트럼프가 제약기업들의 반발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 애꿎은 환자들만 피해를 보는 상황을 겪게 될 수 있다.
또는 제약산업이 유럽 등 다른 선진국의 약값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최혜국 대상 국가의 약값을 크게 올려 미국의 약가 인하를 최소화하는 식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장 제이 바타차리아는 "트럼프는 유럽과 미국의 약값을 강조하며, 새로운 질서를 통해 유럽은 그 부담을 분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유럽에 돈을 받아내 제약회사를 도울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의약품 가격에 미칠 파장과 국제연대의 필요성
트럼프의 최혜국 정책이 미국의 약가 인하를 불러온다면, 글로벌 제약 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미국 시장에서의 수익 감소는 제약사들의 글로벌 가격 전략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높은 가격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다른 국가에서의 낮은 가격을 상쇄했던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제약사들은 미국 외 시장에서 약가 인상을 시도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은 주요 타깃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약가 결정 과정에 외국 가격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특히 소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암이나 희귀질환 대상 치료제는 경제성 평가를 면제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국 약값의 상승이 국내 약가 정책에 큰 영향을 불러올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이 트럼프의 '최혜국 약가' 정책 비교 대상국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만약 한국이 미국의 비교 대상국에 포함되었다면 한국의 약값은 제약회사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트럼프의 약가 정책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각 국가들의 약가 결정 과정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현재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는 공식 가격과 실제 거래가격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비밀 리베이트, 할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실제 약가는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비싼 의약품에 대해 대체로 '위험분담제'라는 비밀계약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환급 등의 방식으로 의약품의 실제 거래가격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트럼프의 '최혜국 약가' 정책이 이런 비밀 거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공식 약가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책의 실효성은 크게 떨어진다. 약가 투명성 없이는 트럼프의 약가 인하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 약가 투명성 문제는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큰 숙제 중 하나다. 서로 다른 나라가 얼마에 약을 구매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이런 정보 비대칭을 이용해 약가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고 있다.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가 중요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의약품 시장 투명성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미미했다. 만약 트럼프의 정책을 계기로 약가 투명성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면, 국제적 논의가 다시 활발해질 수 있다.
한국은 최근 치료비용이 수천만 원 넘는 약제가 급속하게 증가하는 등 신약의 고가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 점차 비싼 항암제나 희귀질환치료제가 도입되면서 관련 약제비도 매년 10%가량 증가한다. 국제적인 약가 투명성 개선은 한국처럼 인구수가 많지 않고 제약산업 발전이 뒤처진 국가에 매우 중요하다. 한국은 국가 간 약가 정보를 공유하는 전략을 취해야 효율적인 약가 결정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발표는 단순하게 한 국가의 약가 인하 정책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또한 특정 기업의 대미수출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는 데 그쳐선 더더욱 안된다.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트럼프의 정책들이 글로벌 제약시장의 어떤 불균형을 만드는지 주목해야 한다. 또한 국가 차원의 약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국제적인 약가 투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국제 연대와 협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