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1 11:55최종 업데이트 25.05.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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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29일 전국 26개 대학 자민투, 민민투 소속 학생 1700명이 민주조선 대자보 사건으로 건대 본관 건물을 점거한채 농성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20일 여인형·문상호 공판에 출석한 이진우 전 육군수도방위사령관은 12·3 비상계엄 당시의 국회 난입과 관련해 "대통령이 발로 차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끄집어내라고 해서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1986년 당시의 전두환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때 전두환이 벌인 참극 중 하나가 이달 20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한 건대항쟁 무력진압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건국대학교에서 개최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 전후 시위·농성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1500여 명의 대학생이 체포·연행되고, 이후 1200여 명이 구속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불법구금 상태로 수사를 받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건"이라고 건대항쟁을 정의한 뒤 이렇게 말한다.

"조사 결과, 정부는 1986년 10월 28일부터 같은 달 31일까지 건국대 농성에 대한 경찰 진압 과정에서 참가자 1500여 명을 전원 연행했다. 이후 청와대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체포된 1500여 명의 학생 중 단순 가담자를 포함해 1200여 명을 구속하라고 지시하고, 적용법조 관련 지침을 내리는 등 사건 처리에 개입했다. 검찰은 체포된 1200여 명의 학생에 대해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 발부 시한을 넘겨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등 적법절차 원칙을 위배했다."

과거로 회귀하고 있던 전두환

전두환 정권은 대규모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듯이 경찰 병력 8500명과 헬기까지 동원해 상황을 키웠다. 이 때문에 묻지마 체포·구속이 벌어졌다. 그해 11월 4일 자 <동아일보>는 시위 전력이 전혀 없는 서울대 약대 2학년 이지은 등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보도하면서 "건대에서 열린 국화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학생들에게 밀려 건물에 들어가게 됐다"라는 그의 진술을 전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228회(2017.1.19. <프레시안>)는 "경찰은 건국대에 들어오는 여러 학생들에 대해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라며 "자유스럽게 들어가게 한 다음에 구국 행진이 선포된 순간 일망타진하려고 일시에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제목이 '최대 구속에 숨가쁜 법원·검찰'인 위 <동아일보> 기사는 "사법사상 최대의 구속영장 신청과 관련, 경찰·검찰·법원 직원들은 3일 밤을 꼬박 새우며 대거 구속에 따른 홍역을 치렀다"라고 한 뒤 구속절차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지적한다.

이 기사는 "1인당 40여 건이 넘는 구속영장 기록을 검토·발부해야 하는 판사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라고 한 뒤, "기소 단계에서 옥석이 가려지지 않겠느냐"라는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의 말을 들려준다. 지금은 시간에 쫓겨 적당히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시정되지 않겠느냐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기사는 또 다른 판사의 더 황당한 말을 들려준다.

"한 젊은 판사는 수사 기록이 판사실로 올라온 뒤 상당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둑 등으로 소일을 하다 기록 검토에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느냐고 묻자 '선풍기 바람에 날려 대충 훑어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풍자 섞인 대꾸."

인권침해의 위험성은 또 다른 데서도 꿈틀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 따르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실은 '공산혁명분자 폭력난동 사건'으로 몰고 가겠다고 전두환에게 보고했고, 전두환은 방화·파괴·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하라고 함으로써 학생들을 정치범이 아닌 흉악범으로 만들고자 했다.

또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은 "한두 명 정도에게는 사형선고까지 고려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청와대와 안기부가 적용 법조와 형량까지 정해줬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1980년처럼 독이 바짝 올라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서슬 퍼렜던 전두환 정권은 1982년 5월에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 사건'인 장영자 사건이 터지고 이순자가 배후 인물로 의심받으면서 기가 다소 꺾였다. 이로 인해 전두환의 최측근인 허화평·허삼수가 영부인 리스크를 지적하며 이순자 일족과의 절연을 요구하는 사실상의 항명이 벌어졌다. 이는 정권 내부의 암투로 이어지고, 전두환과의 힘겨루기에서 패한 허화평·허삼수는 청와대 내에서 왕따가 되다가 12월 20일 경질됐다.

그 뒤 다소 부드러워진 전두환이 다시 험악해진 계기는 1985년 2·12 총선이다. 이때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35.2%,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은 29.3%를 득표했다. 서울·부산·광주·인천·대전에서는 신민당이 전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배출했다. 사실상의 승리를 거둔 야권의 대정부 투쟁과 직선제 개헌운동이 이로써 힘을 받게 됐다.

1980년 9월에 제1기 임기를 시작하고 이듬해 3월에 제2기 임기를 시작한 전두환은 퇴임 3년을 앞두고 거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12 총선 엿새 뒤에 강경파 장세동을 안기부장에 임명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가 과거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뒤 더욱 격화된 개헌 투쟁과 여야대결 와중에서 전두환의 폭발을 가까스로 막아준 것은 서울 아시안게임과 경제 상황이다. 한국이 주최하는 사상 최대의 국제 행사가 다가오고 있다는 점, 기업 경제가 안정 기미를 보인다는 점이 그의 폭발을 억눌렀다.

그 상태에서 아시안게임이 순조롭게 개막(9.20)되자 전두환의 본능은 크게 꿈틀댔다. 폐막(10.5) 이전인 9월 26일, 전두환은 안기부장·육참총장·보안사령관·경호실장 등에게 비상계엄 및 비상조치 검토를 지시했다. 또 신민당의 유성환 의원이 10월 14일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시는 통일'이라는 당연한 말을 한 것을 트집 잡아 용공 사태로 몰아갔고, 그달 28일 건국대에서 벌어진 상황을 키워 공산폭동으로 몰고 갔다.

'비상조치'까지 생각했으나...

1987년 6월 당시 전두환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를 축하해 주는 모습.연합뉴스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1986년 하반기는 대체로 전두환 정부와 민정당이 국정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다"는 말로써 그해 하반기 전두환의 자신감을 알려준다. 노태우는 자신감이 생긴 전두환이 건대항쟁 직후인 11월 2일에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9일 자정을 기해 비상조치를 결행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한다. 여세를 몰아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헌법 위의 헌법'인 긴급조치권을 1972년 헌법에 규정했다면, 전두환 정권은 그와 비슷한 비상조치권을 1980년 헌법(제8차 개정헌법)에 삽입했다. 이 헌법 제51조 제1항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교전상태나 그에 준하는 비상상태"가 발생할 경우에 "국정 전반에 관하여 필요한 비상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비상조치를 발포하려는 전두환의 의도는 불발됐다. 아시안게임은 끝났지만 서울 올림픽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정권 내부의 신중론을 극복하지 못했다. 기업 경제가 잘되는 상황을 뒤집는 것도 부담됐다. 또 차기를 노리는 2인자 노태우의 입장에서는 정국 판도가 뒤바뀌는 게 유리할 리 없었다.

여기다가 11월 5일에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만 되면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해 정국의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노태우는 이 선언의 파급력을 중시했다. <노태우 회고록>은 "이날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과 비상조치를 일단 미루는 결정을 했다"고 알려준다.

1985년 총선에 패한 전두환은 12·12 및 5·17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 당시의 폭력적 마인드로 되돌아가 계엄과 비상조치를 강구했다. 그런 그에게 유성환 사건과 건대항쟁은 좋은 빌미가 돼 비상계엄 결행을 지시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전두환을 움직인 폭력적 마인드는 학생들을 대거 체포하고 적법절차 없이 인신을 구속하는 대규모 인권침해를 낳았다. 그의 폭력성이 정권 내부에서 제지되지 않았다면 훨씬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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