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재임 당시 국무회의 주재하는 전두환.1984.10.23
연합뉴스
현행 헌법을 낳은 1987년 6월항쟁 직후의 여야 개헌 협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대통령 임기다. 이 협상은 여야 동수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서 8월 1일 시작됐다. 그해 8월 13일 자 <동아일보> 2면 사설은 "지금까지 몇 가지 합의를 본 것도 있지만 대통령 임기, 부통령제, 유권자 연령 등 여야의 이견 폭이 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전을 못 보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8인 정치회담 이전부터 6년 단임제를 주장했다. 민정당은 단임제에 꽂혀 있었다. 이 당은 전두환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중에 나온 7년 단임제 개헌을 자신들의 치적으로 선전했다. 그해 7월 13일 자 <동아일보> 3면은 "민정당은 아마도 단임의 대국민 호소력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전두환 재판이 진행될 당시인 2019년 1월 1일, 전두환의 배우자 이순자는 <뉴스타운> 인터뷰에 출현해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누구예요. 나는 우리 남편이라고 생각해요"라는 망언을 했다.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인 근거로 이순자가 제시한 것 중 하나는 '7년 단임제'다. 이순자는 "제일 중요한 거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단임을 이룬 것"이라며 "그 덕분에 지금 대통령들이 5년만 되면 착착, 더 있으려고 생각을 못하잖아요"라고 자부했다. 이순자의 태도에서 나타나듯이 1980년대의 민정당 정권은 단임제를 자신들의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했다.
반면, 통일민주당(민주당)은 4년 중임제를 선호했다. 위 7월 13일자 <동아일보>는 "미국식 대통령제의 정형에 충실하겠다는 취지"라고 평했다. 이 방식에 애착을 가진 인물은 김대중이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나는 원래 정·부통령제와 대통령의 4년 중임 방식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두 당이 각각의 명분을 내세워 4년 중임과 6년 단임을 주장했지만, 양측의 실제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단임이냐 중임이냐는 관건이 아니었다. 4년이냐 6년이냐가 핵심 포인트였다.
민주당이 4년제를 선호한 것은 양김 단일화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단일화를 하려면 두 사람이 4년 뒤 바통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있어야 하기에 4년 중임제를 지지한다는 관측이었다. 위 <동아일보>는 "후보 조정을 용이하게 하려는 고려가 깔려 있는 게 사실"이라며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간에 정치적 약속으로 4년 단임을 교대한다는 역할 분담이 가능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양김이 4년 뒤 교대하도록 하는 것과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하는 것은 상호 충돌의 여지가 있었다. 처음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 약속을 깨고 재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민주당은 이를 위한 장치를 고민했다. 그해 7월 4일자 <조선일보> 2면은 "민주당은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 허용'으로 하되, 당내 양대 계보 간의 관계, 특히 양김씨 관계를 고려하여 새 헌법에 의한 최초 대통령에 한해서는 단임만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정당이 6년 임기제를 내세운 데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6월항쟁이라는 폭격을 맞은 이 당은 4월혁명으로 붕괴된 자유당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했다. 전두환의 단임제 정신을 계승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시민혁명을 당한 정당이 그 직후의 선거에서 패하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민정당은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두 김씨를 분열시키는 방안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 생각해 낸 것 중 하나가 김대중의 정치적 재기를 돕는 것이었다.
그해 7월 11일, 민정당 정권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정치 행보가 제약된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켰다. 또 1980년 헌법 제42조가 대통령 출마 요건으로 규정한 "선거일 현재 계속하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 조건을 폐지하는 데도 협조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된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를 받은 뒤 1982년 12월 23일 미국으로 떠나 1985년 2월 8일 귀국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그의 대선 출마는 1990년 2월 8일 이후에나 가능했다.
김대중의 족쇄를 풀어줘 김영삼과 맞붙게 하는 것 외에, 민정당이 고안한 또 다른 방안은 대통령 임기를 길게 하는 것이었다. '4년 뒤에 교대하자'고 하면 단일화가 가능해도 '6년 뒤에 교대하자'고 하면 단일화가 쉽지 않으리라는 게 민정당의 판단이었다. 위 <동아일보>는 "임기를 6년으로 함으로써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좀 더 어렵게 하려는 계산도 하고 있지 않나 추측된다"고 분석했다.
민주당이 부통령제를 강력 주장한 데 반해, 민정당이 이를 끝끝내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직을 양보한 쪽이 부통령후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민정당은 두 김씨 중 한쪽이 부통령후보에 만족해 단일화에 동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각의 주장을 폈다. 김대중도 민정당이 그런 이유로 부통령제를 반대한다고 이해했다. 위 <김대중 자서전>은 "나와 김영삼 씨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4년 중임이냐 6년 단임이냐는 외형상으로는 차기 대선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실은 당장의 대선과 직결된 것이었다. 4년이나 6년 뒤가 아닌 1987년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싸움이었다. 그래서 막판까지도 쉽사리 타결되지 않았다.
'5년 단임제'의 정치적 맥락

▲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당시 김대중 통일민주당 상임고문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연합뉴스
팽팽한 협상 구도에 변화를 준 쪽은 민주당의 협상권을 쥔 김영삼 총재다. 임기 문제로 인해 개헌 협상이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해지자, 그는 돌파구를 뚫을 목적으로 6년제와 4년제의 중간인 5년제를 제안했다. 5년제를 제안한 이상, 중임제는 힘들었다. 5년 중임제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입장은 5년 단임제로 새롭게 정해졌다.
그해 8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하단에 따르면, 김영삼은 5년 단임제의 명분을 찾기 위해 종전 당론인 4년 중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4년 1차 중임은 8년 장기집권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김영삼의 태도 변화는 김대중에게도 악재였지만, 민정당 후보 노태우에게도 실망스러웠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개헌 협상을 지켜보던 노태우가 5년 단임제 방안이 부각되자 협상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대통령 임기에 대해 4년 중임 또는 6년 단임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던 기억은 난다"라고 말한다. 노태우는 "8년 장기집권이 될 수 있"는 4년 중임제에도 내심 기대를 걸고 있었다. 6년이나 8년 집권을 생각했던 것이다.
김영삼의 태도 변화로 인해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제로 굳어졌다. 이와 함께 부통령제도 무산됐다. 민정당이 가장 크게 희망한 두 가지가 그렇게 성취됐다. 이는 양김 단일화를 위한 환경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결국 단일화 협상은 깨졌고, 김대중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만들어 독자 출마했다. 12월 16일 대선에서 노태우는 36.64%, 김영삼은 28.03%, 김대중은 27.04%, 김종필은 8.06%를 득표했다. 4년 중임제와 부통령제가 관철돼 양김 단일화에 유리한 여건이 조성됐다면 과반수가 넘는 득표율로 민주진영이 승리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이처럼 현행 헌법의 5년 단임제는, 양김을 분열시켜 정권을 연장하려는 전두환 세력의 의도와 민정당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김영삼 측의 타협이 낳은 결과물이다. 이 규정에는 무엇보다 민주화를 저주하는 전두환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