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오른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준석 개혁신당, 권영국 민주노동당,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으로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SBS 프리즘센터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21대 대선 1차 후보자 토론회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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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하나의 축으로 정렬되지 않는다.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비서구 협력체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고 있다. 브라질, 인도, 터키 같은 중견국들은 미중 경쟁 사이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택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스스로 이익을 계산하고, 파트너를 선택하며, 협상의 무게를 조율한다. 줄을 서기보다는 주도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외교 전략을 설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중견국 외교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이들 중견국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북핵 위협, 미중 갈등의 지정학, 미국과의 동맹, 분단된 한반도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전략적 자율성은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외교적 선택의 포기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조건이기에 더욱 능동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은 더욱 그러하다.
그는 가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조건을 본다. 상대가 얼마나 선택지를 갖고 있는지를 본다. 결국 우리는 강력한 협상력을 가진 동맹이 되어야 한다. 맹목적 동맹이 아니라, 준비된 동맹이 되어야 한다.
전략적 자율성은 대미 협상에서 협상력의 원천이 된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처럼 거래 중심의 외교를 추구하는 정부 아래에서는, 전략적 자율성을 가진 동맹국일수록 더 큰 영향력과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첫째, 트럼프식 외교는 거래다. 줄 선 동맹보다는 선택지가 많은 동맹이 유리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방식은 '충성도'보다 '가치'와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한국이 전략적 공간을 넓힐수록, 미국은 한국을 '관리해야 할 전략 자산'으로 본다.
둘째, 자율성은 레버리지를 만든다. 터키는 나토 회원국임에도 러시아와 S-400 계약을 체결하며, 미국과의 군사 협상에서 지속적으로 레버리지를 창출했다. 한국도 기술, 에너지, 플랫폼 외교에서 다양한 파트너와 협력을 확장할수록, 미국과의 경제안보 대화에서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은 대중 견제에서 미국에 유용한 카드가 된다. 미국은 중국 견제에 있어 직접 개입 부담을 줄이려 한다. 이때 한국이 일정 수준의 균형 외교를 유지한다면, 미국은 한국을 '완충자이자 전달자'로 인식할 수 있다.
넷째, 동맹은 종속이 아니라 능동적 파트너십일 때 존중받는다. 트럼프는 '무임승차하지 마라' '돈을 더 내라' '기여를 증명해라'는 프레임으로 동맹을 재정의해 왔다. 한국이 수세적 방어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외교 자산을 제시할 경우, 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트럼프 시대, 오히려 한국 외교의 기회일 수도

▲지난 4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트럼프 행정부 관세정책 대응을 위한 통상안보TF 1차 회의'에서 김현종 단장(전 국가안보실 2차장)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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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6일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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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외교가 필요한가?
첫째, 미국 중심의 안보 동맹은 유지하되, 기술·통상·외교 등에서는 주도적 입장을 갖는 동맹 내 자율성이 필요하다. 인도, 호주 등과의 협력 확대를 통해 대중국 대체 공급망도 준비해야 한다.
둘째, 중견국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기후변화, 디지털 인권, 지식재산 등 안보 이슈 밖의 분야에서 중견국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포럼을 만들고, 그 속에서 한국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 아세안,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지대와의 외교 자산을 쌓아야 한다. 단순 개발협력을 넘어, 기술과 교육, 문화 플랫폼을 결합한 한국형 협력모델을 통해 '대안 제공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
지금은 어느 진영의 깃발 아래 줄을 서는 시대가 아니다. 흔들리는 국제 질서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설계하고 나아가는 시대다. 강대국이 규칙을 흔드는 지금, 중견국이 살아남는 방식은 자율성과 균형이라는 새로운 외교의 기술에 달려 있다. 그리고 한국은 그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다.
물론, 한국은 다른 중견국들과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이 곧 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외교 자산과 전략적 가능성을 새롭게 설계하고 확장해야 할 이유가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대국의 흐름에 기계적으로 편승하는 외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능동적 궤도 설정이다.
트럼프 정부의 귀환은 단지 외교 환경의 불확실성을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국 외교가 기존의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이익과 우선순위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한다. 이런 조건 중심의 접근은, 준비된 중견국에게는 오히려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다.
그동안 한국은 '수동적 동맹'으로 분류되며 전략적 공간이 제한되었던 반면, 이제는 새로운 자율성의 여지를 확보할 수 있는 국면에 진입한 셈이다. 미국의 전통적 외교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틀 바깥에서 동등한 거래 파트너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수동적 외교의 틀에서 벗어날 때다. 한국은 기술력, 민주주의 경험, 시민사회의 역동성, 그리고 글로벌 연결성이라는 복합적 자산을 보유한 나라다.
이 모든 요소는 단순한 생존의 외교를 넘어, 질서를 설계하고 협력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제는 그 잠재력에 걸맞은 외교 전략을 구상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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