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왕 어진의 모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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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교체가 정권교체의 피날레가 된 때가 있다. 조선 숙종 때는 조정의 당쟁과 궁중의 여인천하가 연동됐고, 이런 속에서 남인당의 장희빈(희빈 장씨)과 서인당의 인현왕후가 역사적인 승부를 겨뤘다. 이 시기 정권교체에서는 조정 요직뿐 아니라 중전 자리의 향방도 당쟁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지표가 됐다. 조정과 중궁전을 모두 차지해야 이 시기의 진정한 집권당이었다.
1674년에 13세 나이로 왕위에 올라 1720년까지 재위한 숙종은 특정 당파의 무한 집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쪽이 강해진다 싶으면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며 집권당 교체를 유도했다. 숙종 집권기의 특징인 이 현상은 환국(換局)으로 불린다. 경신환국(경신대출척)·기사환국·갑술환국(갑술옥사)·경인환국·병신환국(병신처분)·신임환국(신임옥사)·을사환국 등이 이에 해당한다.
숙종이 즉위한 해에 보수세력인 서인당의 51년 집권이 종식되고 남인당이 정권 창출에 성공했다. 남인당의 집권과 함께 임금의 직무를 시작한 숙종은 6년 뒤인 1680년에 경신환국을 성사시켰다. 남인당이 임금의 당숙인 복선군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아 몰락하고 서인당이 재집권하게 됐다.
그해에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인현왕후 민씨가 이듬해인 1681년에 두 번째 중전이 됐다. 서인당의 지지를 받는 이 중전은 이때 14세였다. 남편 숙종은 스물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왕자를 낳지 못했다. 왕자는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생겨났다. 이때가 1688년 11월 20일(음력 10.28)이다. 장희빈이 29세, 숙종이 27세일 때였다. 인현왕후는 21세였다. 장희빈이 낳은 이 아이가 숙종을 뒤이어 제20대 주상이 될 경종 이윤(李昀)이다.
즉위 14년 만에 아들을 얻은 숙종은 아이에게 맏아들 지위를 신속히 부여하고자 했다. 음력으로 숙종 15년 1월 11일 자(양력 1689.1.31) <숙종실록>은 이날 숙종이 이윤을 원자(元子)로 삼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득남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뒤의 일이다.
원자는 왕의 적장자에게 부여되는 지위였다. 특별한 이변이 없으면, 세자 책봉이 예정된 자리였다. 남인당과 연계된 후궁을 어머니로 둔 왕자가 군주 자리를 예약하는 것을 서인당은 좌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원자 책봉을 막기 위한 정치 공세에 돌입한다.
숙종은 송시열의 천적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35권에 따르면, 군주에 대한 직언을 책임지는 정3품 대사간 최규서는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이시고 왕자가 탄생하신 지 겨우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라면서 무엇 때문에 이리 서두시는 것이냐는 말로 왕을 제지했다.
공조판서 심재(沈梓)는 "여러 신하들이 후일 왕비가 생남(生男)했을 때를 염려해서 말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며 조정의 중론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사했다. 그의 발언은 훗날 중전이 아들을 낳게 되면 혼란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경고였다. 선조 임금이 후궁의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뒤늦게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은 일로 인해 왕실에 불어닥친 피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었다.
집권당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숙종이 자기 뜻을 밀어붙이자, 서인당 지도자 송시열(82세)이 나섰다. 이 거물급의 등장은 젊은 임금의 전투 의지를 꺾기보다는 오히려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송시열의 등장은 서인당이 강펀치를 얻어맞고 줄줄이 숙청을 당하는 계기가 됐다.
송시열은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의 중앙군 확충정책 및 북벌정책을 반대했다. 송시열의 압박을 받던 중에 효종은 마흔 살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송시열에 대한 왕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그 뒤 송시열은 1659년과 1674년의 두 차례 예송논쟁에서 인조의 적자인 효종을 서자로 격하시키는 입장에 섰다. 숙종은 그런 송시열을 즉위 이듬해인 1675년에 귀양보냈다.
어린 숙종에게 호되게 당한 송시열은 14년 뒤인 1689년에 원자 책봉을 반대함으로써 다시 한번 숙종과 부딪혔다.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송시열은 "너무 이르다"면서 송나라 신종황제의 사례를 거론했다.
신종은 28세 때 얻은 아들이 후궁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제후급 지위에 책봉했다가 적자가 생기지 않자 나중에 할 수 없이 태자로 책봉했다. 송시열의 표면상 메시지는 '지금 하지 말라', 실질적 메시지는 '하지 말라'였다.
후궁의 아들이라 한동안 제후급으로 지냈던 신종의 아들을 거론하는 상소는 숙종의 감정을 터트렸다. <당의통략>은 "숙종이 격노"했다고 알려준다. 이 책에 따르면, 숙종은 "송시열이 사림(유림)의 영수로서 현저하게 불만의 뜻을 드러냈다"고 격분을 표했다.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거론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송시열은 17세기를 풍미한 보수 정치인이다. 그렇지만 숙종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숙종은 송시열의 천적이었다. 1675년에 송시열을 귀양 보낸 숙종은 1689년에는 송시열을 귀양 보냈다가 사약까지 마시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도 어쩌지 못하고 비교적 진보적인 남인당도 어쩌지 못했던 보수파 거물의 정치생명을 숙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단시켰던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불리는 정권교체의 밑바탕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명릉(숙종, 인현왕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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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기사년인 그해의 원자책봉 문제는 송시열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았다. 숙종의 의지에 맞선 서인당은 이로 인해 정권을 내줘야 했다. 이 해의 집권당 교체는 기사환국으로 불린다.
그런데 장희빈의 아들은 세월이 흐르면 임금이 될 수 있었지만, 잘못하면 서얼 출신의 비애를 겪은 광해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숙종의 조치가 기사환국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후궁의 아들인 이윤을 중전의 아들로 만드는 일종의 신분 세탁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내보내고 후궁 장씨를 중전 자리에 앉히는 승부수를 던진다.
숙종이 중전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꺼내 든 카드가 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영부인 리스크'였다. 숙종 15년 5월 2일자(1689.6.18) <숙종실록>에 실린 임금의 비망기(備忘記, 명령문)는 숙종이 제시한 이혼 사유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공공연히 큰소리로 장희빈의 예전 품계인 종4품 숙원(淑媛)을 거론하면서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등등의 막말을 퍼부었다.
숙종은 후궁과 자신의 관계를 투기하고 왕실을 저주했다는 등의 사유를 내세워 인현왕후를 유책 배우자로 만들었다. 부부싸움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을 '영부인 리스크' 차원으로 키워 이혼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런 뒤 이듬해인 1690년에 정1품 희빈인 후궁 장씨를 중전으로 올렸다.
이로써 조정 요직에 이어 중궁전의 주인 자리가 바뀌고, 두 무대에서 전개된 남인당과 서인당의 대결은 일단락됐다. 인현왕후의 패배는 그를 지지했던 서인당의 몰락을, 장희빈의 승리는 그를 후원했던 남인당의 성공을 상징했다.
숙종은 이윤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서인당과 인현왕후를 내몰고 그 자리에 남인당과 장희빈을 앉혔다. 숙종의 동기는 아들 이윤의 장래를 보장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은 이윤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서인당을 집권당 자리에서 내쫓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이윤이 또 다른 광해군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도 필요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둬가며 이윤의 어머니를 중전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윤은 장희빈이 중궁전에서 쫓겨난 뒤에도 적장자 지위를 계속 갖게 됐다.
1689년에 개시된 정권교체는 집권당 교체와 중전 교체에 의해 완성됐다. 장희빈이 중전이 된 것은 이 정권교체의 마침표 기능을 했다. 이로써 이윤의 지위도 공고해지고, 이윤을 지지하는 남인당의 입지도 안정됐다. 아들의 앞날을 탄탄대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마음, 왕실의 정통성을 높이겠다는 군주의 마음이 기사환국으로 불리는 이 정권교체의 밑바탕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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