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8 18:45최종 업데이트 25.05.1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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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네트워크 넥스트 브릿지(Next Bridge)는 지식경제, 기후, 디지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등 전환의 시대를 직면하여 비전과 정책과제를 연구하는 포스트 386 세대(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서 90년대생 청년) 중심의 연구자·정책 전문가의 네트워크다. 넥스트 브릿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회 지향과 정책과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정책담론을 위한 대중적인 소통을 희망하며 다양한 분야의 정책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의 정책과제를 가지고 정책 칼럼을 연재한다.[기자말]
‘무능, 무지원, 무대책 고교학점제 지금 당장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앞에서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주최로 열렸다.권우성

고교학점제는 한마디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전에는 출석일수를 중심으로 졸업 기준을 정하였다. 진로교육, 학교 교육과정 다양화, 학생 선택권 보장, 책임교육 실현 차원에서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고교학점제 정책이 시작되었으며 윤석열 정부로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다. 최근 들어 고교학점제를 전면 폐지하라는 요구가 일부 교원단체를 중심으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폐지 요구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한데, 그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 시기상조론 - 고교학점제의 철학과 취지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고교학점제에 관한 준비가 현재 매우 미흡하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한 학생을 유급시켜야 하는데, 온정주의와 형식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에서 실제 유급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② 신자유주의론 - 학생의 선택에 의존하는 교육과정 운영은 시장 기제를 차용한 방식이며, 보편교육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다양한 과목을 열고 학생의 선택권에 의존하는 방식은 교원의 노동 조건만 악화시킬 수 있다. 학생들의 다양한 교과목 수요를 고려하다 보면 자칫 교원자격증이 없는 이들에게도 교원의 문호를 열 수 있는 우려도 있다.

③ 기-승-전-대입론 - 고교 교육은 대입의 영향으로부터 결국 자유로울 수 없고, 내신 상대평가 체제와 수능의 비중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는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자신의 진로에 맞는 과목 선택을 하면 좋겠지만, 학생들은 좋은 내신 등급을 얻기에 유리한 과목이나, 수능에 도움이 되는 과목을 중심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며, 고교학점제는 탁상행정의 전형으로 대입 제도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고교학점제는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일 수 있다.

④ 교육부·교육청 무능론 및 지원 미비론 - 고교학점제는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정책이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서 고교학점제는 일종의 서자(庶子)이며, 방계(傍系) 정도에 불과한 변방의 정책으로 취급을 받았다. 이주호 장관의 관심사는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에 있다. 정권교체 후에 교육부는 고교학점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역량 부족인지 의지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거의 준비하지 않았다. 교육청 역시 교육부의 입만 바라볼 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교육청 간 실력 차이도 나타나고 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나이스)도 고교학점제와 연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외부 사설 업체가 만든 별도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학교 시간표를 짜는 상황에 이른 현실을 말한다.

⑤ 노동 환경 악화론 - 고교학점제의 도입으로 인해 가뜩이나 힘든 교사들의 업무가 가중되기 시작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지침을 쉽게 내리지만, 결국 교사들이 몸으로 때우고 있다. 여러 과목을 개설해도, 최소성취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학생을 위해 상담과 별도의 보충수업을 운영해도 보상은 없다. 무엇이든지 학교에서 알아서 논의해서 결정해야 하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마련한 지침대로 일을 하려면 교사들의 체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놓고서 차기 정부에서도 고교학점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원단체의 주장대로 고교학점제 전면 폐기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시작도 못 한 고교학점제가 모든 문제의 원인?

교육부가 고시한 2022 개정교육과정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을 보면 '학점'이라는 용어가 88회 언급된다. '선택'이라는 용어도 66회 언급된다.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자체가 고교학점제의 철학과 방향, 가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고교학점제 전면 폐지는 2022 개정교육과정의 전면 폐지와 동일한 주장으로 봐야 한다.

또한, 공정성을 이유로 내신과 수능의 상대평가 기조를 유지한 상태여서 불만족스러운 면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2028 대입제도는 고교학점제를 고려하여 재설계된 측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인수위 시절에 고교학점제 폐지를 검토하였지만, 유지로 결론을 내렸다. 전면 폐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며, 오히려 폐지가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고교학점제 정책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개념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정의 역사 가운데 조금씩 스며들어 왔고 진화되었다. 그러나 학교 현장이 최근 들어 힘들어지다 보니, 고교학점제를 사실상 '악마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고교학점제 때문에 사교육비가 증폭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자퇴가 늘어났고, 학교 간 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혹자는 고교학점제가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고 말한다.

고교학점제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시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고1은 공통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 상당수 학생들이 여전히 수능을 보고, 교원의 기본 수급을 고려하여 일반선택 과목(화법과 언어, 미적분1, 영어1, 영어2, 세계사, 물리학, 사회와 문화, 체육1, 체육2, 음악, 미술, 연극 등)을 중심으로 편제·운영한다. 학교의 지정 과목 비중이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진로선택과 융합선택은 2학년과 3학년 때 본격 적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교학점제는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 도입 반년 만에 사교육비와 자퇴생이 늘어났고, 고교 간 격차가 심화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고교학점제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내신 상대평가 기조라든지 정시의 비중 확대와 같은 대입 제도라든지, 지역의 여건에 따른 학교의 교육력 차이 발생과 같은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 모순과 한계가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고교학점제를 혁신의 매개로 변화하는 교육 현장

그동안 연구와 집필을 위해 여러 고등학교를 방문하고 교육과정을 분석하였다. "교육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의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학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노력은 2022 개정교육과정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많이 시키는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양질의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에서 승부를 건다. 어떤 철학과 가치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할 것인가에 관해서 교원들은 치열하게 학습하고 논의하였다.

동시에 교육과정위원회에 학생과 학부모, 교원을 참여시켜 지금까지의 교육과정을 평가하고 성찰하면서, 요구를 바탕으로 무엇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한마디로 교육과정의 거버넌스가 만들어진다. 단순하게 학생에게 과목 안내 및 선택만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교원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과목 선택 능력을 키워준다.

상위권 중심의 학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교육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숨통 트일 수 있는 과목을 개설한다. 학교의 지정 과목을 줄이면서,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부여한다. 소인수 과목을 열면 상대평가 구조에서 내신이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의 등급 획득보다는 학생의 교육과정을 통해 얻게 될 '경험과 학습의 질'을 중시한다. 과제연구와 과제탐구가 가능한 과목 개설을 통해 학생들은 도전적 과제를 설정하면서, 친구들과 협업하면서 프로젝트를 완수한다.

일회성 진로 체험이 아닌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진로를 만나며,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발견된 학생의 역량과 성취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교사들은 각자 개설한 교과목을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안내하며, 프로젝트- 독서- 동아리- 진로 등의 과정과 연계한다.

교육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의 원인을 파악하고, 원인에 맞는 지원책을 고민하면서 학생을 지원한다. 어떤 학교는 국가가 제시한 교육과정 과목에 만족하지 않고, '고시 외 과목'을 활용하거나, 학교 차원에서 별도의 교과목을 개설하여 교육과정 특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개별학교에서 열기 어려운 과목은 인근의 학교와 연계하거나, 교육청(지원청) 차원에서 개설한 공동교육과정을 적극 활용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지는 학교 사례들은 조금만 발품을 팔면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정 혁신이 대입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는 사이에, 오히려 일반고등학교에서 기존의 교육과정 편성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사례들이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이렇게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은 고교학점제를 개혁의 매개로 또는 혁신의 근거로 삼으면서 교육과정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실천하는 보석 같은 교원들이 좌절하거나 소진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육학점제, 한국 교육의 대전환의 계기로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원단체에서는 교육부의 각성을 촉진하기 위해 고교학점제 폐지를 주장할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고교학점제를 매개로 한국 교육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방식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고교학점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있다. 대입제도–교원 인사-행정 지원–고교 체제-예산–교육지원청의 역할 변화-학교자치 등 여러 조건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즉, 고교학점제는 '패키지' 또는 '세트' 정책의 속성을 갖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성공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교육과정 중심의 교원 배치 및 교원 확충 ② 초등학교와 중학교 차원에서 최소성취기준에 이르지 못한 학생에 대한 발견과 지원 ③ 최소 성취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의 경우, 과목 재이수제 내지는 대체과목 이수제의 과감한 적용 ④ 내신의 절대평가 전환, 수능 절대평가 도입 및 자격고사화 ⑤ 교육과정 네트워크 중심의 새로운 고교 체제 개편(우리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과목은 다른 학교 또는 온라인 학교에서 수강 가능) ⑤ 아날로그 행정 체제에서 벗어나서 현장의 요구를 반영한 AI 행정 체제 혁신(예: 나이스 프로그램의 현장 최적화) ⑥ 학교 차원의 교육과정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교육(지원)청의 교육과정 지원 서비스 강화(예: 학교에서 열기 어려운 과목은 교육지원청에서 개설하고, 최소 성취기준 미도달 학생을 위한 교과목 운영 등) ⑦ 다과목 개설에 따른 교원의 노동력 보상이 가능한 수당 체계 개편 ⑧ 출결 사항과 생활기록부 정리 시점 등 현장에서 느끼는 불편한 점들에 대한 교육부와 교육청의 즉각적이고도 유연한 대처 및 거버넌스 구축 등이 필요하다.

적어도 과거에 우리가 받아왔던 고등학교의 모습에 대해서 고교학점제를 실천하는 주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학생의 삶과 무관한 과목을 오로지 대학입시만 위해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수능 대비 문제풀이식 수업으로 3년을 보낼 수는 없다. 상대평가의 경쟁 체제에서 상위권 학생을 위해 들러리를 서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위권 학생들도 존엄하고 고유한 존재들이며, 교육과정의 편제에서 그런 철학과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국영수만 중요하고, 그 외의 과목은 주변부 과목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붕어빵처럼 모든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이 획일화되어서는 곤란하다. 과목 선택은 곧 학생 스스로 삶을 무엇으로 채워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교육과정에도 참여와 소통, 조정과 합의가 가능한 거버넌스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고민과 성찰의 과정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고교학점제 자체는 죄가 없다. 그 의미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조건을 무능한 정치와 정책의 주체들이 아직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은 포기가 아닌 요구가, 비난이 아닌 실천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교육과정을 위해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실천하는 교원들이 지치지 않도록, 차기 정부가 고교학점제의 새판을 잘 설계하고 지원해 주기를 바란다.

* 필자소개 : 김성천은 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장학사, 교육부 교육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학습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고교학점제란 무엇인가>(공저), <소환된 미래교육>(공저), <교육자치시대의 인사제도혁신>(공저), <융합교육으로 미래교육의 길을 찾다>(공저)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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