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8 14:06최종 업데이트 25.05.1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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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자료사진

사법부는 입법부·행정부와 형식상으론 대등하지만, 실질을 놓고 보면 사정이 다르다. 입법부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돼 있어 든든하다. 한국의 행정부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 더해 공권력을 보유한 경찰·군대와 관료기구를 갖고 있어 더욱 든든하다. 국회와 정부가 가진 이 같은 '무기'들이 한국 법원에는 없다. 사법부의 위상을 뒷받침할 권력 자원들이 부족한 편이다.

사법정의가 확립되고 사법독립이 이뤄지려면 법관의 소신과 양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도 중요하다. 법원과 국회·정부의 스킨십뿐 아니라, 국민과 법원의 스킨십을 강화하는 것도 절실하다. 국민들이 직접 사법부에 힘을 실어주고 사법부를 견제할 수 있어야, 법원이 입법부·행정부 및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월하다.


그런 물적 토대가 없으면, 권력의 시녀로 안주하는 법관들이 생기기도 쉽고 권력을 갖고자 정치에 개입하는 법관들이 생기기도 쉽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법정의나 사법독립의 상당 부분이 법관 개인의 양심과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사법정의와 사법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인물 중 하나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대법원장을 역임한 가인 김병로다. 그의 노력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를 존경하는 후배 법관들이 독재정권 치하에서 소신껏 재판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변론, 해방 후에는 법관들의 버팀목으로

1957년 12월 16일, 당시 퇴임한 김병로 전 대법원장이 경무대를 방문, 이승만 대통령과 자리를 함께했다.연합뉴스

김병로는 김옥균 갑신정변 3년 뒤인 1887년에 지금의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그는 절의를 중시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88년에 김학준 당시 서울대 교수(민정당 국회의원 겸직)가 김병로의 손자인 김종인 당시 서강대 교수(민정당 국회의원 겸직)의 도움을 받아 저술한 <가인 김병로 평전>은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두 아들과 함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제봉 고경명의 후예인 고제찬의 딸", "아버지는 상희(相熙)로 1865년에 태어나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지냈다"라고 알려준다.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이 까마득한 조상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던 시대에 김병로의 어머니는 의병장의 후예였고 아버지는 임금의 잘잘못에 대해 바른말을 고하는 정6품 관료 출신이었다. 김병로는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위 평전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 18세의 김병로가 최익현의 의병투쟁에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의병투사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학업에 열중한 김병로는 1913년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전수학교(경성법률전문학교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19년경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강의 경력 등이 인정돼 판사로 특채됐다가 곧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됐다.

그의 변호사 활동은 10대 시절의 의병투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광주학생독립운동,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 단천노조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서 증명되듯이,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변론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한 변론이었다. 그는 40세 때인 1927년에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됐다. 이 경력은 그가 어떤 심정으로 변호사 활동을 했는지를 알려준다.

해방 뒤 그는 친일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해 중앙감찰위원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자주독립을 돕지 않는 미군정하에서 사법부장을 지내고, 남북분단을 조장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대법원장이 됐다. 의병투사와 독립운동가에 어울리지 않은 발자취였다.

한편, 이 시기 그의 활동에서는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사법정의·사법독립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싸움들이 발견된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폭주 앞에서 법관들이 위축되지 않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4년 임기 만료를 앞둔 이승만은 1952년에 재집권을 위해 임시수도 부산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뜯어고쳤다. 이때 대법원장 김병로는 판사들이 정치 외풍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데에 역점을 뒀다. 1992년 3월 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언론인 이경남의 기고문 '결단의 한국인 (10):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씨'는 이렇게 기술한다.

"52년 봄의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해서 대통령에게 밉보이고 괘씸죄를 서슴지 않은 인물과 사건이 속출하자, 자유당 정부는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마구 얽어매었다. 그러나 법원 판결은 번번이 무죄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법원 판결에 볼멘 소리로 토로하였으나 김 대법원장은 가볍게 일축했다. '판사가 내리는 판결은 대법원장인들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무죄판결이 불만이라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는 것이지.' 김 대법원장이 이렇게 외풍을 막아주었으므로 당시 법관들은 소신껏 판결할 수 있었다."

불법 비상계엄으로 헌법을 바꾸고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2년 뒤에는 3선 도전을 목적으로 또다시 불법 개헌을 시도했다. 이 개헌안은 제55조 제1항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라고 한 뒤 부칙에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이승만에 한해 2차 이상의 중임을 가능케 하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 27일의 국회 투표에서 의결정족수 3분의 2에서 1표 모자라는 135명의 찬성표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203명의 3분지 2는 135.33이고 사사오입원칙에 따라 135.33은 135'라는 억지 논리를 앞세워 개헌안 공포를 강행했다.

이때 김병로는 침묵하지 않았다.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아니었지만, 잘못된 처사를 묵과하지 않고 정언(正言)을 했다. <가인 김병로 평전>에 따르면, 그는 기자들 앞에서 "개헌안 통과 정족수 문제는 정부나 법원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국회 자체가 해결할 문제"라고 전제한 뒤 "사사오입 방식으로의 처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폭정을 사법적으로 충분히 제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국운이 걸린 중대 기로에서는 대법원장의 소명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부산정치파동 이전에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저지하고자 국회 반민특위를 압박할 때도 그는 이승만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법학> 2016년 제57권 제2호에 실린 한인섭 서울대 교수의 논문 '반민족행위자의 처벌과 김병로'는 김병로가 이승만을 겨냥해 '법률에 따른 반민특위의 행동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응수했음을 알려준다. 김병로는 이승만 정권이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한 1949년 6·6사태 직후에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위와 같은 조치는 직무를 초월한 과오로서 불법이고, 가차 없는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승만은 관료기구와 군·경을 이끌었고 친일세력과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 이승만을 상대로 김병로는 '대법원장의 경고'를 묵직하게 날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결정적 순간마다 국민의 편에 섰던 사람

2022년 9월 13일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2022 법원의 날 기념식에서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국가가 국민에게 범하는 죄과의 상당부분은 행정부와 사법부의 공조로 이뤄진다. 행정부의 잘못을 법원이 정당화해 주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런 데서도 나타나듯이, 사법부가 옳은 길을 선택하면 행정부의 잘못이 상당부분 예방되거나 사후적으로 시정된다. 사법이 국민들을 재판하는 기능뿐 아니라 국가권력을 시정하는 기능도 있다는 점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결정들로도 확인된다.

김병로는 사법부가 옳은 길을 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결정적 순간마다 국민의 편에 서서 국가권력에 맞섰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가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어른이다. 큰어른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가인 김병로>의 저자인 위 한인섭 교수가 <미래정책> 2020년 여름호에 기고한 '가인 김병로의 사법 리더십'은 그의 호가 가인인 이유를 알려준다. 기고문은 "그의 호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街人)이었다"라며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어디 거처할 곳도 없는 거지와 같은 신세가 조선인의 삶이고 그의 삶이었다"고 말한다.

김병로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가인(佳人)으로 자처하지 않고 '거리의 사람'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국민과 대중의 편에 섰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인민 옹호'에서 찾았다. 그런 그의 정신이 미군정 사법부장 시절에 쓴 '사법기관의 사명'이라는 글에도 나타난다.

1948년 1월호 <법정(法政)>에 수록된 이 글에서 그는 민주주의는 사법에 의해 완성된다면서 사법부의 임무는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확보라고 역설했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중을 억압하는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정치의 확립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히 사법기관의 엄정한 행동과 비상한 노력이 않이면 그 성과를 기할 수 없읍니다. 엇제 그러냐 하면, 민주주의의 정체는 인민의 최고도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함에 있고,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사법기관의 전적 책임이고 직능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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