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7 19:49최종 업데이트 25.05.1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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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차별' 하면 박정희 집권기가 떠오르지만, 조선 인조 정권 때의 지역 차별도 대단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12) 광해군을 실각시킨 이 정권은 조선 멸망 때까지 계속될 역사적인 지역 차별을 일으켰다. 이 차별의 피해자는 경상도였다.

광해군시대의 여당은 동인과 서인 중에서 동인에 뿌리를 둔 북인당(북당)이다. 서경덕과 조식을 추종하는 이 당파의 일파인 대북당이 광해군 정권을 이끌었다. 북인당은 송강 정철과 서인당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면서 생겨난 당파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송강 정철과 서인당은 조작 냄새가 짙은 정여립 역모사건(기축옥사)을 키워 집권에 성공했다. 그런데 정철이 1591년에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 임금의 미움을 사면서 서인은 여당 지위를 상실했다. 이때 한양 북악산 밑에 사는 동인 이산해 등은 강경 처벌을, 한양 남산 밑에 사는 동인 우성전 등은 온건 대처를 주문했다. 이것이 동인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기원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온건파 영수 유성룡이 남부지방인 경상도 출신이라서 남인이란 명칭이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북인당의 핵심 기반도 다름 아닌 경상도였다.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서부는 남명 조식, 동부는 퇴계 이황(남인)을 지지하는 당파의 거점이었다.

서인당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는 전 정권 여당인 북인당을 철저히 짓밟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대규모 숙청이었다. 발본색원에 가까웠다.

인조의 할아버지인 선조나 인조의 증손자인 숙종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일반적인 군주들은 권력투쟁에 패배한 당파를 어느 정도 살려두려고 노력했다. 이는 새로운 집권 세력을 견제하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흔히 인조반정(反正)이라는 긍정적 표현으로 불리는 인조 쿠데타 때는 그런 제어 장치가 없었다. 전 정권 인사들을 마구 죽이거나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국계보연구> 2024년 제15권에 실린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논문 '인조정권의 북당 숙청 과정과 해주 정씨 정승(鄭勝)'은 순조 때의 이원조가 쓴 <응와잡록>을 근거로 그 실태를 보여준다. 이 논문은 "북당 숙청의 피바람은 재기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계획적이고도 철저했다"라며 "(쿠데타 직후에만) 사형당하거나 죽은 사람 81명을 포함하여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숙청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때의 숙청은 악명 높은 수양대군의 숙청보다 가혹했다. 이 논문은 "세조 등극 과정에서 처형되거나 폐고된 가문은 성종의 온건정책과 선조 대의 사림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원되는 사례가 많았지만, 인조반정에서 처형되거나 몰락한 가문은 조선의 국운이 쇠락한 조선 말에 이르러서야 그 일부가 신원되었다"고 설명한다. 숙청 규모가 광범위했으므로 사면·복권이 꽤 나왔을 법도 하지만, 광해군의 여당에 대해서는 그런 시혜 조치가 인색했던 것이다.

인조 쿠데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규모 숙청

2025년 4월 23일 전직 대통령 윤석열씨가 경기 성남 판교의 한 보리밥집에서 남성 일행 셋과 식사를 하기 위해 메뉴판을 들춰보고 있다(가운데 노란 동그라미).제보자 제공

지난달 28일 <오마이뉴스>에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보리밥집에서 일행 3명과 동석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사진이 실렸다. 식당 벽면을 등진 윤석열 주변에는 일행이 아닌 손님들이 여럿 있었다. 이달 9일에는 어린이날인 지난 5일 그가 서울 동작대교 인근 한강공원에서 반려견 목줄을 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됐다.

내란죄 혐의로 수사받는 이가 반려견의 목줄을 쥐고 대낮에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인조 쿠데타 직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정변들도 예외는 아니지만, 1623년에는 특히 그랬다. 박병련 논문에 나오는 "500명"은 정변 직후의 규모다. 이 논문은 "거대한 정치 엘리트 지형의 변화였다"라며 그 뒤에도 수십 명씩 처형되는 대규모 숙청들이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경상우도 출신의 관직자들과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정배(定配)되었다"고 논문은 설명한다. 한양의 임금을 기준으로 경상도 우측 지역인 지금의 경상남북도 서부에 근거지를 둔 관료나 선비들이 사형이나 유배 등의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것이다.

광해군 정권 실력자인 정인홍(1535~1623)을 스승으로 둔 박건갑의 발언은 당시 분위기를 잘 요약한다. 의금부의 수사·심문 기록인 추안(推案) 및(及) 국안(鞫案)을 수록한 <추안급국안>에 따르면, 그는 "경상도 사람들은 반정 이후로 지금까지 보전된 것을 괴이하게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60대 후반인 그가 수사기관에 붙들린 것은 쿠데타 1년 반 뒤인 1624년 하반기다. 과장법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목숨을 보전한 경상도 사람들은 자신의 행운을 괴이하게 여긴다'는 진술은 그 1년 반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잔혹한 숙청은 단순한 정계 개편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지역 차별로 제도화됐다. 이는 경상도 지역의 정치적 기운을 꺾어 이곳이 두고두고 차별을 받는 원인이 됐다.

인조의 4대손인 영조가 영남 출신들로부터 '차별관념을 갖지 말아 달라'는 연명 상소문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음력으로 영조 9년 2월 25일 자(양력 1733.4.9.) <영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영남은 근본이 되는 땅"이라며 자신이 노력하고 있는데도 그런 상소가 올라온 것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는 영남에 대한 자신의 성의가 약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불평했다.

왕권강화 및 차별 해소와 연결되는 탕평정치의 주역인 그는 자신이 경상도에 신경 쓰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그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조정권이 공고히 해놓은 차별은 영조 뒤에도 계속됐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 임금 때의 경상도 구미 출신 무관이 남긴 <노상추 일기>를 보면, 정부에서 인사조치가 발표될 때마다 노상추(1746~1829)가 '이번에는 영남 출신이 몇이나 들어갔나'라며 초조해 하다가 거의 매번 '역시나' 하며 허탈해하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정통성 문제로 시달린 인조

영화 <남한산성> 속 인조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CJ 엔터테인먼트

인조정권이 경상도와 북인당을 철저히 짓밟은 것은 정통성 부족 때문이었다. 인조 쿠데타의 주역들은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표방한 것과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 등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어머니 폐위' 부분은 많은 공감을 얻었지만, 이런 명분을 내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인조가 군주의 정통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시대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보다는 '정당한 사람'이 군주의 정통성을 갖게 된다고 인식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당한 사람'은 군주의 피를 물려받은 후계자다. 이 점은 인조의 약점이었다. 광해군은 '선조 임금의 서자'이지만,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는 '선조 임금의 서자의 아들'이었다. 거기다가 합법 절차가 아닌 쿠데타로 즉위했다. 그래서 광해군보다도 정통성이 약했다. 서자라는 이유로 광해군이 겪은 고초를 감안하면, 인조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지를 알 수 있다.

그 점은 왕실과의 국혼에 대한 유례 없는 거부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유력한 가문이 아닌 보통의 사대부 가문들은 왕실과의 혼인을 두려워하며 사주단자 제출을 기피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광해군 실각 직후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거부감이 강력했다.

인조 1년 윤10월 27일 자(1623.12.18.) <인조실록>에 따르면, 왕자의 부인을 뽑는 간택에 지원하라는 요구를 사대부들이 기피하자, 인조 임금은 시각장애 무속인들을 집집마다 투입해 '처녀를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치도록 했다. 정통성 약한 임금과 엮이기 싫어하는 사대부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인조 정권의 정통성 문제는 이괄의 난 같은 역모 사건이 잦았던 데서도 확인된다. 개중에는 광해군 복위를 꾀하는 사건들도 있었다. 인조 9년 2월 3일자(1631.3.5) <인조실록>에는 승려 출신들이 '광해군을 모셔오자', '신라 부흥을 위해 경상도에서 거병하자'라며 반란을 모의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광해군을 모셔 와 조선이 아닌 신라를 부흥시키자는 역모가 발생한 것은 인조 임금으로 인해 인조 자신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권위까지 약해졌음을 보여준다.

정통성 문제로 불안감에 시달린 인조 정권은 재집권 가능성이 있는 전 정권 세력을 숙청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591년의 정철 숙청을 계기로 생겨난 북인당은 1623년의 이 탄압을 이기지 못해 사실상 멸절됐다. 그 뒤에도 북인당 출신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조직적 차원이 아닌 개인 단위로 움직였을 뿐이다.

'조선시대 당쟁'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사색당파다. 동인과 서인에서 나온 남인·북인과 노론·소론이 사색의 주역이다. 이 중에서 가장 빨리 소멸한 최단명 당파가 북인당이다. 이들은 30년 정도밖에 활동하지 못했다. 이는 사회개혁 의지가 강했던 동인들의 역량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고 동인당의 지역 기반인 경상도가 오랜 차별을 받는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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