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산재노동자의 날을 맞아 국회에서 열린 ’하늘 위 노동의 진실, 항공승무노동자 실태를 말하다‘토론회
공공운수노조
인천국제공항이 자회사소속 노동자들을 '필수유지업무'라는 명목으로 구속했다면 항공사들은 항공승무노동자들이 차고 있어야 할 '노동법'이라는 안전벨트를 풀어버렸습니다.
지난 4월 28일 산재노동자의 날을 맞아 국회에서 '하늘 위 노동의 진실, 항공승무노동자 실태를 말하다'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14시간을 날아 국회에 도착한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항공노조 권수정 위원장은 충혈된 눈으로 항공승무노동자의 현실을 증언했습니다.
"한 승무원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휴가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집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미디어에 노출된 스튜어디스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었습니다. 항공승무노동자들은 밥 먹을 장소가 없어 흔들리는 비행기 위에서 서서 밥을 먹고, 휴게장소와 휴식시간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멋진 유니폼 뒤에 가려진 항공승무노동자의 현실을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직업의학과 김형렬 교수팀이 들추어냈습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승무노동자 53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건강 실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승무노동자들은 몸이 약한 여성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고강도 육체노동입니다. 노동자의 작업 중 신체적 피로도와 노동강도를 평가하는 척도인 '보그스케일'을 이용한 항공승무노동자의 노동강도는 14.1로 건설의 12.4, 집배원의 14.0보다 높았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불편한 자세로 무거운 물건을 들다 보니 산재사고도 빈번합니다.
노동자 절반 이상인 52.6%의 노동자가 1년 이내 사고를 당했는데, 무거운 물체 운반 및 취급이 가장 중요한 사고 원인으로 꼽혔습니다. 산재신청도 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경영평가와 상급자의 압박 (16.9%) 해고/임금 등 불이익 우려로 (12.7%) 산재를 포기한다고 답변했습니다.
항공승무노동자의 폭력 경험도 심각합니다. 모욕적 행동과 언행 경험은 근로환경조사의 20배, 성차별 경험은 근로환경조사의 22배를 기록했습니다. 근로환경조사란 우리나라 15세 이상 노동자의 작업환경, 건강 직무만족도 등을 파악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3년마다 실시하는 공식조사입니다. 항공승무노동자들이 평균적인 노동자들보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항공승무노동자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건 일방적으로 바뀌는 근무일입니다. 토론회에 참여한 이현진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은 인력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당월에 휴가를 쓰려면 승원팀장과 면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휴가를 낸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입니다. 그나마도 반려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달 전에 스케줄을 받지만 스케줄이 시작되면 네 다섯번은 스케줄이 변경됩니다. 개인의 계획이나 의사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승무원이 부족해서 이런 일들이 20년 넘게 계속됩니다."
실태조사 결과도 증언과 일치했습니다. 한 달 평균 스케줄 변경 횟수는 2회이고, 월 평균 4회 이상 스케줄이 변경된다고 답한 노동자도 19.3%를 기록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스케줄이 변경됐다고 답한 항공승무노동자가 64.5%였습니다. 근무하지 않는 날이라도 언제든지 일 할 수 있다는 긴장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고무줄 스케줄로 악명이 높은 맥도날드도 매주 근무시간 통보 전에 형식적인 사전협의를 합니다. 김형렬 교수는 노동시간의 길이보다 중요한 것이 노동시간의 안정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항공승무노동자들이 겪는 휴가 거절, 폭력, 산재 은폐 등은 5인 미만 사업장, 노조 없는 소규모 사업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처럼 대기업에서 벌어졌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세상 가장 높은 곳, 구름 위 하늘 공장에서 일하는 항공승무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에어부산 객실 승무원 노동조합의 탄생
▲울산공항에서 에어부산 항공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2020.4.25.
연합뉴스
지난 6일 에어부산 객실승무원 노조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저가항공사 최초의 노조 설립입니다. 그러나 공항과 항공 산업은 필수공익사업장이라 노조를 설립하더라도 단체행동권을 행사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노동조건의 변화도 더디기만 합니다.
정훈님, 혹시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출근이라는 뜻의 'presence'를 따서 만든 단어로 몸이 아프거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병가를 내지 않고 출근해서 일을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항공승무노동자의 62.1%가 프리젠티즘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다른 노동자의 5배를 기록했습니다. 몸이 아파도 억지로 출근하는 프리젠티즘 현상이 계속되면 기업도 손해입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업무상 실수, 다른 직원에게 감염 등의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업들도 프리젠티즘 현상을 주목합니다.
노동환경이 열악함에도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지 못하면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국민들도 공항과 항공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수백만 명의 국민이 이용하는 공항과 비행기가 운행이 되면 결국 시민들의 생명 안전이 위협 받게 됩니다.
대선입니다. 공항노동자의 필수유지업무라는 족쇄를 어떻게 풀지, 승무노동자에게 노동법이라는 안전벨트를 어떻게 채울지를 이야기하는 대통령 후보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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