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1일 당시 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축을 받아 국회 정론관 마이크 앞에 선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 정부는 역사를 왜곡하고 범죄를 정당화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더하고 있다"며 "아베 총리가 진심으로 공식 사과하고 합당한 법적 배상을 이해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소연
눈 뜨고도 못 찾는 고향 부산을 둔 이옥선은 대구 이옥선보다 한 살 많다. 대구 이옥선은 주민등록상으로는 1930년 생이지만 실제로는 1928년 생이다.
대구 이옥선이 법정투쟁을 통해 기념비적 승리를 얻어냈다면, 부산 이옥선은 위안부 참상을 알리는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2002년 미국 브라운대 강연을 시작으로 근 20년 동안 거의 매년 외국에 나가 위안부 참상을 알렸다. 2013년에는 독일·일본·미국의 12개 도시를 순회했다. 이때 이동거리가 약 5만km였다고 한다. 지구 한 바퀴(4만 120km)를 넘는 거리였다.
위안부로 연행됐을 당시 그는 일본군의 구타로 치아가 빠지고 청력이 약해졌다. 일본군 칼에 찔려 손과 발에 흉터도 생겼다. 거기다가 해방 전부터 관절염이 심했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흉터가 생긴 발,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무릎을 끌고 지구를 한 바퀴 이상의 거리를 다니며 전쟁범죄를 고발했던 것이다.
그는 인권운동가로도 족적을 남겼지만, 위안부 참상을 후세에 알리는 증언자로도 역할을 했다. 그의 증언은 위 보고서 외에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와 여성부가 2002년에 촬영한 인터뷰 동영상 등에도 남아 있다.
소녀 이옥선은 어려서부터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입학 시즌인 매년 4월경만 되면 학교에 보내달라고 어머니를 졸랐지만, 어머니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열네 살 때 우동가게의 식모 겸 직원이 되고, 몇 달 뒤 울산 술집의 식모가 됐다. 강제연행을 당한 것은 이때였다. 위 보고서는 "1941년 7월 심부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남자들이 이옥선을 강제로 잡아채어서 트럭에 실었다고 한다"는 내용을 알려준다.
위안부 이옥선이 처음 배치된 곳은 옌지(연길) 비행장의 위안소다. 여기서 도미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는 위안부뿐 아니라 노역자 일까지 했다. 그가 갔을 당시는 비행장 확장 공사가 진행될 때였다. 그는 그때 자신이 한 일을 "거기 가서 비행장을 닦는 거야, 그 마당"이라는 말로 회고했다. 좁쌀밥과 김치 시래기로 끼니를 때우며 그런 강제노역까지 감당했던 것이다.
작업 현장에는 가시 철조망이 있었다. 거기에 손을 대면 전기가 통했다. "우리 도망간다고. 도망가면 거기 붙어 죽으라고 전기를 넣는 거야"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주말에는 위안부 한 명당 25명에서 4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이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살상에 가까운 폭행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는 몸집도 작고 남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어느 어린 위안부가 일본군의 칼에 난도질 당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군인들이 끌어가 갖고. 조그마니까 그게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맘대로 못 하니까, 성숙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여자를 칼로 째는 거야. 째고 찌르고 죽이는 거야."
아비규환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에, 어디 나무라도 없나 하고 생각해봤다. 그는 "우리 한국에는 집집마다 나무가 얼마나 많아"라며 "그렇지만 중국에는 집, 사람 사는 데는 나무가 없으니까"라고 한 뒤 "그래서 죽지도 못하지"라고 털어놨다.
결국 그의 결행이 단행됐다. 한 사람당 25~40명을 상대하는 날, 그래서 위안소 대문을 열어두는 일요일을 이용해 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무사히 벗어났지만, 방향을 몰랐다. 이때만 해도 고향 집만큼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지만, 만주 땅에서는 눈을 뜨고도 어디가 어딘지 몰랐다. 그래서 급한 김에 눈에 띄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 잠시 뒤 붙들렸다.
도로 붙잡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폭력이었다. "그때 내가 죽지 않고 산 일이 참 하늘이 봤다는 거야"라고 그는 회고했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끔찍한 구타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에는 군인이 구둣발로 구타했다. 다음엔 경찰이 때렸다. 경찰이 "또 도망가겠는가?"라고 묻자, "집에 보내주면 도망 안 한다"고 대답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아 계속 맞았다. 때리던 경찰이 지치자, 이번에는 헌병이 들어왔다. 그는 헌병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헌병 불러오면. 구두가 참 두꺼운 거야. 군인들 신이. 그걸로 다 차고, 여 온통 피멍이 되고. 그다음에는 여기 허리띠, 소가죽이라는데 이렇게 넓은 거야. (중략) 이런 허리띠이기 때문에 든든해. 그거 풀어가지고 때리면, 여기다 한 번씩 때리면 시퍼렇게 굴뱅이가 막 지는 거야."
시퍼런 피멍이 든 채로, 다음날 그는 군인들을 받았다. 그때 그의 방에 들어간 군인들은 다들 달아나듯 도로 나갔다. "이튿날 일어나서 군인, 다른 군인들 접대를 하게 되면, 윗도리 벗겨보면 막 놀라서 달아나는 거야. 이게 뭐인고 하고"라고 그는 회고했다. 이옥선이 아픈 육신을 이끌고 근 20년간 세계 각국을 다니며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 원동력을 짐작게 해주는 장면이다. 50년이 넘도록 그때의 원한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들 죽기 전에 배상하고 우리가 이 뿌리를 뽑아야"
▲건강 악화로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빈소가 12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쉴낙원 경기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부산 출신인 이 할머니는 14살 때 중국으로 옌지(延吉)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고 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다가 2000년 6월 58년 만에 귀국해 이듬해 어렵게 국적을 회복했다
연합뉴스
그는 일본이 만행을 저지른 사실뿐 아니라 만행을 저지르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현실에 더욱 분노했다.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이 핏값을 너희에게 받아야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털어놨다.
이옥선은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내각이 야합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했다. 사과와 반성과 배상이 전제되지 않는 방식으로는 핏값을 조금도 받아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위 인터뷰에서 이옥선은 자신을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항상 들려주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할머니들 죽기 전에 배상하고 우리가 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처럼 그는 죽기 전에 핏값을 꼭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받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대구 이옥선 할머니의 별세로 생존 위안부는 10명이 됐고, 이번에 부산 이옥선 할머니의 별세로 생존 위안부는 6명으로 줄어들었다. 할머니들 생전에 핏값을 일부라도 받아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지만,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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