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서울 명동 YWCA 앞에서 가족법 개정 가두 캠페인에 나선 이태영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과 회원들
정일형·이태영박사기념관
일제와 싸우느라 배우자를 고생시킨 정일형은 1945년 해방 뒤에 "이젠 짊어진 보따리 바꿔 맵시다"라고 이태영에게 말했다. 이에 힘입어 이태영은 서른두 살 때인 1946년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3년 뒤 졸업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이태영은 38세 나이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리영희의 말대로 여성 1호인 데다가 가정주부라서 그의 합격은 언론에도 보도됐다. 그해 1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홍일점 이 여사'라는 제목으로 "현 국회의원 정일형씨 영부인 이태영 여사"의 합격을 보도했다.
'영부인'은 판사 임용에는 실패했다. 함께 수습을 받은 동기생들은 다들 판검사가 됐지만, 그는 탈락했다. 81세 된 그를 인터뷰한 1995년 3월 28일 자 <한겨레>는 "이 박사는 그 이유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이던 정일형씨의 아내인 그의 판사 임명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집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게 된 이태영은 뜻밖의 상황을 맞닥트렸다. 1990년 7월 10일 자 <매일경제>에 실린 인터뷰를 할 당시, 76세 된 그는 38세 때를 회고하며 "판사 임용을 해주지 않아 변호사 개업을 했더니 약자인 여성들이 몰려왔어요"라며 "마치 나를 4천년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와 호소하는데, 사무실은 항상 울음바다였어요"라고 말했다.
이승만 덕분에 뜻밖에도 인기 변호사가 된 그는 1956년에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개설하고 이를 토대로 여성인권운동을 본격화했다. 가족법 개정 투쟁으로 요약되는 그의 여성운동 주제 중에서 동성동본불혼제 및 호주제 폐지 투쟁은 반봉건 운동의 성격도 띠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보편적이었고 이 풍습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다. 태조 왕건의 손녀인 천추태후가 왕실 밖으로 시집가지 않고 사촌오빠인 경종 임금과 혼인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는 동성동본 불혼제가 고유의 전통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가족법 연구> 1984년 창간호에 실린 김주수 연세대 교수의 논문 '동성동본불혼제도에 관하여'는 이 제도에 관해 "이조시대에 이르러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나라에 발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동성동본불혼제는 유교 성리학자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를 한층 공고히 할 목적으로 정착시킨 악법이다. 남계 혈통을 기준으로 동성동본을 판별해 혼인의 가부를 결정하는 이 제도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보편적이었던 데릴사위제도를 약화시키며 사회구조를 한층 더 남성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 제도에 함축된 여성 차별은 사농공상의 '농공상' 차별 및 노비·소작농 차별과 연동돼 남성 지주계급 출신의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왕조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한국인들의 토지와 임야를 빼앗으면서도 동성동본 불혼제 같은 봉건적 악습은 건드리지 않았다. 위 논문은 "일제시대에도 이조시대의 제도에 따라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는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기술한다.
우리 사회가 올바른 길 걷도록 도운 진정한 어른

▲1992년 9월 1일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제3차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태영 여사(오른쪽)가 남측대표단과 함께 판문점에 도착해 북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영은 그런 봉건 체제에 맞서 투쟁했다. 여성들의 에너지를 모아 여성단체연합을 만들고 정부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집회·방송·강연 등을 통해 가족법 개정운동을 전개했다. '보따리를 바꿔 맨' 남편 정일형도 국회의원 시절인 1957년에 민법 개정안 발의를 통해 이 운동을 지원했다.
1950년대에 시작된 이 투쟁은 그의 사후 7년 뒤인 2005년의 민법 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는 이때 폐지됐다. 이태영과 여성운동가들이 반세기 동안 싸운 반봉건 인권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태영은 여성운동과 민주화 투쟁이 별개가 아님을 잘 보여줬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와 인권 말살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1977년에는 김대중·문익환·함석헌·함세웅 및 남편 정일형 등과 함께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태영은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받았다. 대법원 선고 직후에 형집행정지 결정이 나서 징역을 살지는 않았다.
동성동본불혼제나 호주제 같은 전근대적 악법은 물론이고 여성 차별이 어느 정도나마 감소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 및 인권 증대에 기여했다. 이는 각 가정의 아내와 딸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대중의 전반적 지위를 상승시켰다. 여성운동은 여성 노동자의 권익 증진에도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이 운동의 성공은 노동자 전반의 권리 증대에도 기여했다.
이태영이 참여한 한국의 여성운동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토대가 됐다. 그는 봉건적 폐습을 철폐하고 여성의 지위를 개선시켜 한국 사회를 한 단계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운 진정한 어른이다. 윤석열 정권의 반여성 정책은 이태영 같은 어른들과 함께 우리 사회가 계속 올바른 길을 추구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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