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2 12:04최종 업데이트 25.05.1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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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지하철역 모습. 자료사진.연합=OGQ

경기도 평택의 전자 회사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강아무개씨의 집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입니다. 서울에서 평택까지 출퇴근이 힘들지 않냐고요? 강씨의 회사는 통상의 사업장과 달리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시행해 강씨는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퇴근합니다.

강남역으로 통근버스가 운행하는데 사업장까지 40여 분 남짓이면 도착합니다. 회사 생활 10년 차로 연봉이 8500만 원 정도인 강씨의 요즘 고민은 세금입니다. 코로나 감염병이 종식되며 경기가 살아나 강씨의 회사는 수익이 늘었습니다. 성과급이 늘어 임금이 증가했지만, 갑자기 늘어난 세금은 부담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 보고서(최근 근로소득세 증가 요인 및 시사점)는 2023년 기준 강씨와 같이 연간 총급여가 8000만 원 이상인 노동자는 전체의 약 12%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부담하는 근로소득세는 전체의 약 76%가 넘는다고 분석했습니다.

강씨의 집은 서초구의 낡은 단독 아파트이지만 코로나 시기 집값 상승 시기에 덩달아 올라 최근 공시가격이 12억 원이 넘었습니다. 종합부동산세 대상인 그는 1주택 실거주자의 경우 종부세 부담을 줄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윤석열은 파면됐고 21대 대통령 선거의 막이 올랐습니다. 정치인들은 앞다퉈 강씨의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재명 대선 후보의 더불어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합니다. 이재명 후보는 주택의 상속세 기준 완화나 고소득자에 대한 근로소득세 과세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정책 의지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보수에서 극우 정당으로 변화해 가고 있는 국민의힘도 강씨의 고충을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김문수 대선 후보가 "세금이 중산층을 힘들게 한다"라며 배우자 간 상속세 폐지 등 감세를 공약했고, 경선 상대였던 한동훈 후보는 선도적으로 "중산층의 나라를 만들겠다"라며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약속했습니다.

인천광역시 남동공단의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최아무개씨는 경기도 시흥시에 삽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이 어렵고 회사가 5인 미만 영세업체라 통근버스를 운영할 상황이 못 됩니다. 그래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데 직선거리로 10km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지만 출근 시간에는 항상 차가 막혀 1시간 가까이 소요됩니다.

입사 10년 차인 최씨는 월 52시간의 연장근로를 꽉 채워 월 약 450만 원, 연간으로 약 5400만 원을 법니다. 주야간 맞교대를 할 때는 연간 6000만 원을 벌었는데 주 40시간제를 시행하면서 일하는 시간과 임금이 좀 줄었습니다. 잔업을 줄이고 가족들과 시간을 더 보내볼까 하다가도 매월 들어가는 아이들 학원비를 생각하면 주말 특근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최씨는 아이 둘과 아내와 24평 아파트에서 삽니다. 코로나 때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보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 '영끌'해서 집을 샀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외벌이로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월급의 절반 이상을 원리금 상환에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라 생활이 버겁습니다.

주요 정당 후보들은 강씨와 최씨를 모두 중산층으로 보고 정책과 공약을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대통령 선거철이면 일부 진보정당을 제외하고 주요 정당들이 공통으로 외치는 정책 목표가 바로 중산층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다양한 처지의 유권자, 중산층으로 묶기 어려워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구분 기준은 소득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방식입니다. OECD는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75~200% 소득을 얻는 집단으로 정의합니다.

2025년 기준 중위소득은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약 600만 원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4인 가구 기준 월 소득 약 450만 원~1200만 원인 가구를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분의 의미가 무색해 질만큼 포괄적이네요.

사실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이처럼 소득수준만을 가지고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펴낸 보고서(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는 단순히 소득수준으로 구분한 중산층을 같은 집단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이 보고서는 3434명을 대상으로 소득과 학력 등을 기준으로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묻는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객관적 소득 기준과 주관적 인식 모두 중산층에 해당하는가 보는 '핵심 중산층' 집단은 약 54%에 불과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17.8%는 객관적 소득 기준으로 상층임에도 자신을 중산층으로 보는 경향이 컸습니다. 이들은 학력이 높고 자기 집을 보유한 비율(약 79%)이 오히려 상층보다 높으며 소득이 높은 관리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보고서에서는 이들을 '심리적 비상층'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약 20%의 응답자는 소득수준에서 중층에 해당하면서도 주관적으로는 자신을 하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직업은 심리적 비상층이나 핵심 중산층에 비해 생산직과 노무직, 판매 서비스직의 비율이 높습니다. 자기 집 보유 비율이 심리적 비상층에 비해 20% 가까이 낮고, 전월세 비율이 높았습니다. 보고서는 이들을 '취약 중산층'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사이에는 사회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발견됩니다. 가령 현재의 세금 제도에 대해 심리적 비상층은 세금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금을 추가로 낼 의향을 묻는 질문에 심리적 비상층은 취약 중산층보다 부정적 응답이 더 높았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로봇과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에 대한 견해차입니다. 이와 같은 기술이 인간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해 인류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심리적 비상층에서는 높은 동의가 나오는 데 비해, 취약 중산층에서는 일자리를 위협해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취약 중산층은 로봇과 AI가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점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취약 중산층의 경우 자동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생산직과 노무직 비율이 높은 데 반해 심리적 비상층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관리직이나 전문직 비중이 높고 기술 활용 능력이 취약 중산층보다 더 월등하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이처럼 중산층은 더 이상 소득수준과 소비수준, 그리고 경제적 처지에서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보고서는 소득수준은 상층임에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비상층이 자신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활용해 보다 높은 목소리를 내면서 이들의 이해가 과대 대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재명 후보의 정책공약 1호는 심리적 비상층이라 불리는 이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기라도 한 것처럼 'K-AI 이니셔티브'라는 제목으로 100조 원을 투자해 AI 강국 건설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편적인 AI 기술 활용을 위해 생성형 AI 무료 사용 등의 정책을 내놓긴 했지만, 주된 방향은 특출한 AI 인재 육성과 함께 AI 산업 인프라 등 생태계 마련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AI 기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산업과 노동자들을 어떻게 챙길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더 세심하게 고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의도와 강남역 유권자만 중요한가

여의도 방향 표시. 자료사진.연합=OGQ

이처럼 다른 처지의 강씨와 최씨를 하나로 묶어 정책을 내놓으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들을 모두 직장인으로 묶어 정책 대상으로 삼은 이재명 후보의 주 4.5일제 정책이 그렇습니다. 이 후보는 기업의 주 4.5일제 도입을 지원해 노동시간을 OECD 평균 이하로 단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연차휴가를 보장하고 과로사 예방을 위한 최소 휴식 시간 제도 도입을 위한 대책도 수립하겠다고 했습니다.

주 4.5일제가 시행되면 자동으로 혜택을 받는 대기업 소속 강씨와 달리 근로 시간과 연차 규정 적용 제외 대상인 5인 미만 사업장의 최씨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노동시간이 줄면 당장 연장 근로소득이 감소하기에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닙니다. 최씨와 같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게는 휴가와 같은 휴식권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의 핵심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물론 최씨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재명 후보는 휴가 지원을 확대하고 초등생 자녀 예체능 학원 세액공제 등 일상생활의 부담도 완화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최씨로서는 반가운 공약입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는 최씨와 같이 주택담보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을 우려하는 무주택자에게 원리금 상환을 3년간 유예해 주고 미성년 자녀 1명당 2년 추가 유예를 통해 내 집 마련 기회를 보장하는 '잠시 멈춤 대출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이 시행된다면 최씨로서는 최장 7년간 주택담보 대출 이자만 납부하며 생활비와 양육비 등 가처분 소득의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이 정책을 시행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요 정당의 무게추는 강씨와 같은 유권자들에게 더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정당의 선거대책사무실은 최씨와 같은 유권자들이 평소에 가기 어려운 여의도에 있습니다.

이준석 후보는 아예 선거 대책사무실을 강남역으로 정했습니다. 어느 시사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준석 후보는 여의도가 아닌 강남역에 선거사무실을 둔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의 가장 미래지향적 산업들이 위치한 테헤란 밸리와 판교, 그리고 화성과 평택, 용인 등 경기 남부의 반도체 벨트의 교통이 뭉치는 곳이 강남역이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후보처럼 주요 정당들은 미래지향적 산업에 종사하는 유권자들의 고충을 중심으로 청취하고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지원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최씨와 같이 근로 시간과 연차휴가 등을 적용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전국적으로 380여만 명에 이릅니다. 아예 퇴직금과 주휴일, 고용보험도 배제되는 초단시간 근로자는 전국적으로 150만 명가량 됩니다. 이들이 일하는 전국의 산업단지는 테헤란로나 판교의 첨단산업 단지처럼 깔끔하고 세련되지도 않습니다.

잡풀이 우거진 진입로에 도로 곳곳은 패이고 출퇴근 교통체증과 협소한 주차 공간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의도나 강남역이 아닌 산업단지에 선거 대책사무실을 마련할 정치인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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