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쉬고 있는 청년 (자료사진)
연합뉴스
"회사가 무서워 취업을 하기 싫으면 어쩌죠?"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그때 나는 청년 니트족을 위한 지원사업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년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은 취업 하지도, 교육이나 트레이닝을 받고 있지도 않는 사람을 뜻한다. 어느 순간 여러 국가 통계에 자주 등장하는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되는 50만 명 넘는 청년들이 이 니트족에 해당한다.
니트를 위한 단체에서 일했지만 나는 니트가 되어본 적 없다. 퇴사를 한 이후에 공백기가 있을 때마다 기를 쓰고 취업을 위해 노력했었고, 보이는 모든 회사에 원서를 넣어 원서를 넣을 곳이 남지 않을 지경에 이른 후에는 영어를 배우거나 코딩 수업을 듣는 등 자기 계발에 힘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까지 '니트는 게으르다'라는 사회 통념을 어느 정도 믿었었다.
그들은 부지런했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니트는 다들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가 일한 단체에서 주로 했던 활동은 '업무' 인증이었다. 자신이 하루에 할 '업무'를 정하고 커뮤니티에 사진과 글로 인증하는 일이었다. 매일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산책을 하며 길가에 놓인 쓰레기를 주워 인증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지우개를 조각칼로 깎아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니트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들과 니트가 된 지 수년이 지난 사람들은 차이가 있었다. 니트가 된 지 수년이 지나게 되면 거의 모두가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경험한다. 대부분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혹은 혼자 니트로 산 지 너무 오래된 탓에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그들조차 일상을 되찾기 위해 부지런히 살았다.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갠 사진을 커뮤니티에 인증했다. 영양제를 먹는 것을 인증한 사람도 있었다. 사회적 관계의 고립은 자주 정신건강의 문제를 야기했고,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이 소꿉놀이처럼 사소한 것이라고 코웃음 칠 수 있겠으나, 그 시간을 보조하고 함께한 사람으로 나는 그들이 일상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에 나쁜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지 배웠다. 니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각자 니트가 된 사연이 빠짐없이 나왔다. 대부분은 형편없던 직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왕따를 당하거나, 하루아침에 해고를 통보받거나, 화장실도 못 가게 하는 회사였거나, 괴롭힘이나 과로 문제가 있었거나, 미래를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일자리였거나. 니트들은 자신이 너무 나약해서 이 모든 것을 버티지 못한 것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아주 힘겹게 나쁜 일자리를 벗어나는 데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경험은 그들을 니트로 만들었다.
정말 이들이 나약했던 것일까? 니트생활자에서 일한 이후 '그냥 쉬었음'이라고 니트가 겪는 일상을 축약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냥 쉬었음'이라는 말은 하루아침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유령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니트들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다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쉬었음'은 니트들이 회사를 나가기까지 어떤 고통을 느꼈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 중요하게, 돈을 버는 '일' 이외에 이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자아실현을 위한 '일'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길가의 쓰레기를 줍는 일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 남과 나를 돌보는 일은 돈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중요한 일이다. 개인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으로 그 일들은 분명히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믿는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서울시 청년일자리센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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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날인 만큼, 열악한 노동환경의 개선과 더 좋은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아이디어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청년들이 모두 노동해야만 하고, 노동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졌다고 믿는 환상 뒤에는 나쁜 일자리와 청년을 병들게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 노동하지 않는 청년들이 손가락질받는 동안 노동하지 않는 청년들을 만든 원인은 정당화된다. 이건 일하지 않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청년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직도 니트를 위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일자리와 연계되어 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도, 청년내일채움공제도, 청년도전지원사업도 청년들을 취업 의지가 있는 이들로 간주한다. 니트 모두가 노동시장에 편입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과 준비되지 않은 이들을 노동시장에 섣불리 투입하는 것은 또 다른 실패의 경험을 선사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물론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가 계약직이거나 최저임금과 비슷한 저임금으로 고착화되어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구직 단념 청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이 만들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냥 쉬었음'으로 대표되는 니트 청년이 늘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분명히 니트 지원 조직에서 일할 때 들었던 정책 아이디어는 정부가 제공하는 것들과 거리가 있어 보였다. 지원 조직에서 했던 일 중 하나는 참여자들에게 소액의 활동 지원금을 주는 일이었다. 이불을 개는 일이든, 영양제를 먹는 일이든, 쓰레기를 줍는 일이든 참여자들은 자신이 정한 활동을 하기만 하면 모두 그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내 기억상 아주 적은 몇 명의 참여자 외에 모두 그 지원금을 받았다.
자신이 정한 루틴과 속도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이를 인정하는 행위가 있었을 때 참가자들은 일상을 회복하고 나와 남을 돌볼 수 있었다. 지원금은 아주 소액이었지만, 소액의 지원금과 응원은 니트인 상태로도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활동 초기와 후기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사회적 연대감과 성취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취업을 기본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일상을 함께하고, 자유로운 활동에 대해 인정하는 일이 니트가 사회로 복귀하는 데 더 필요한 일일 수 있다.
'다정함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

▲니트들이 스스로 작성한 자신의 직업. '이야기 여행작가', '성취자', '시도하는 사람'등 다양한 글이 쓰여있다.
니트생활자
결국 니트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속도가 존중되는 사회이다. 끊임없이 속도를 높여야만 유지되는 경제 구조 속에서 이탈한 사람들의 나약함을 꾸짖기보다, 이들이 시스템의 결함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더 많이 고려되어야 한다. 니트를 빠르게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 일자리 지원 정책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동시에, 그 시간이 니트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탐색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어져야 한다. 니트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전체 일자리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만큼, 탐색과 고민과 휴식의 시간을 보장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시스템의 결함이 있다면, 이탈한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사회의 아이디어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만난 니트들은 비록 취업과 돈을 가져다주는 일 바깥에 있었지만, 나와 남을 돌보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이윤 추구의 논리로만 이들의 활동을 본다면 모두 시간 낭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을 정화하는 자원봉사와 사회적 연대감을 회복하는 일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다.
단순히 취업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들이 쉬는 동안에도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진로를 모색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돈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사회에 가치 있는 일들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염두하고, 이 활동들을 어떻게 진흥할 수 있을지도 우리의 과제로 남아야 한다. 임금 노동이 아니더라도 1인 가구 청년들의 모임을 지원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인원에게 지급하는 참여 소득 등도 니트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원 단체의 표어 중 하나는 '다정함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였다. 지금은 니트 지원 조직을 떠나 기후환경 단체인 그린피스에서 일하고 있지만, 다정함이라는 단어는 나의 인생에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나는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도 다정함이라고 믿는다. 남과 나, 그리고 지구를 돌보아야 한다는 다정함을 포기한 이후 바꿀 수 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히 남을 돌볼 수 있는 사회는 각자의 다름이 존중되어야 가능하며, 인간과 자연을 소진시키는 세상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이탈한 이들을 무시하기보다는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우리가 고민할 수 있길 바란다. 모두에게 충분히 다정한 세상이 오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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