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메리퇴진크리스마스 민주주의 응원봉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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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대한민국'을 위한 여성·젠더 의제를 나는 염불 외듯 줄줄 읊을 수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가족부 기능 확대 및 강화, 지방자치단체 성평등 추진체계 복원, 비동의간음죄 신설, 낙태죄 대체입법 마련, 성별임금공시제 도입, 젠더폭력 근절 및 예방, 생활동반자법 제정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주구장창 들었던 얘기들이자 여성 당사자인 나의 생애에 맞닿은 의제이기에 별다른 노력 없이도 줄줄 욀 수 있다. 비단 내가 아니어도, 광장에 몇 번 들렀을 이들이라면 누구나가 알 법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인의 입으로 한 마디 듣기가 그렇게나 땀이 난다. 사실 지난해 총선 때부터도 성평등 공약은 실종되다시피 했다. 거대 양당은 저출생 해법으로 일·돌봄 균형에 국한돼 있거나(국민의힘), 거기에 성폭력 대응을 조금 끼워 넣은(더불어민주당) 수준이었다. 민주당이 박지현 추적단불꽃 활동가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며 2030 여성에 소구했던 2022년 대선은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질 판이다.
'응원봉 부대'라던 상찬은 어디 가고… 빛의 혁명에는 "모든 국민이?"
6·3 조기대선을 앞둔 현시점은 더욱 참담하다. 탄핵 광장에서만 해도 '응원봉 부대'라며 청년 여성들을 치켜세우더니, 파면이 되자마자 입을 싹 씻는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지난 11일 "광장을 주도했던 2030 여성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은 어떻게 구성하고 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 했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홍준표 전 국민의힘 경선 후보는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며 차별금지 대신 '격차 해소'를, 페미니즘 보다 '패밀리즘'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클릭' 심화는 사실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민의힘 이탈표가 12표밖에 안 나왔을 때부터,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탄핵 반대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지지를 구걸할 때, 탄핵에 반대한 인물들이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출마했을 때 우리는 국민의힘이 '건전 보수'를 넘어 극우 세력을 대변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여기에 화답하듯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먹고사니즘'과 '잘사니즘' 같은 경제 구호를 내세우며 광폭 우클릭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정치권이 성장 담론에만 목매는 사이, 젠더 기반 폭력과 여성혐오범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 사이 서울 미아역 인근의 마트에선 3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일면식도 없는 60대 여성을 살해했다. 인천에서 사실혼 관계인 50대 여성을 살해한 50대 남성이, 경기 수원역 인근에서 60대 여성 행인을 폭행한 20대 남성이 구속됐다.
차별은 낙인, 낙인은 곧 격차다

▲면접을 기다리는 한 구직자의 모습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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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속도에 비해 제도권 정치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젠더와 성평등에 한해서는 더욱 그렇다. 배우 윤여정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째 아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저스트비(JUSTB) 배인은 K-팝 아이돌 최초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보다 전에, 수많은 퀴어들이 퇴진 광장의 시민 발언대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혔다.
내가 퇴진 광장에서 만난 2030 여성과 퀴어들은 스스로가 광장으로 나온 이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사람들",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전하지 못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봉의 한 줄기 빛에 의지해 나갔다. 광장에서의 커밍아웃 또한 마찬가지다. 12월 22일 새벽 남태령에서부터 시작된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한 발화는 실은 경찰 차벽이라는 눈앞의 공권력에 대항한 절절한 토로에 가까웠다.
이들이 이토록 절절한 까닭은 한국 사회에서 차별은 곧 낙인, 낙인은 곧 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인 성별 임금 격차나 채용·승진에서의 성차별은 곧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페널티가 되는 구조를 드러낸다. 한국 인구의 약 4.5~7%로 추정되지만, 가시화되지 않는 성소수자들은 성별 이분법이 엄존하는 직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 실은 격차를 논하기에 앞서 이들에게는 생존이 더욱 절박한 담론이다. 이미 수년째 강력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은 여성이다. 성소수자들은 비성소수자들과 비교해 우울 증상이 4.3배, 자살 시도가 4.5배에 달한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성소수자 노동자 노동실태 및 정신건강 연구, 2025)
최근 발간된 <한겨레21> 제1559호에서는 '상속계급사회'가 만들어낸 '계급통'을 이야기했는데, 차별과 혐오에 따른 통증과 피해의 역사가 여성과 퀴어,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는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윤석열 퇴진 광장을 거치며 서로의 소수자성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 '젠더는 정치가 되지 않'으며, '계급 구조 타파가 중요하다'는 얘기는 탄핵 광장이 끝나면 진보·보수할 것 없이 되풀이한다.
그러나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이라는 국어사전식 정의에 입각하면, 이들의 삶과 광장에서의 연대야말로 정치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따져 붇고 싶다. '차별 금지 대신 격차 해소'라는 홍 전 후보에게는, 존재 자체가 차별의 이유가 되는데 무슨 수로 격차를 해소하겠느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파면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행진

▲27일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 주최로 "2025 대선, 여성폭력 해결! 나중은 없다!” 다이인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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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서 "2030 여성은 잡은 물고기"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겨레21>, '
여성 혐오부터 여성 삭제까지… '내란 종식'만 하자는 21대 대선', 2025.4.25.) 심상정 같은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대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부가 설명도 따라붙었다. 직접 광장을 이끌어 '윤석열 탄핵'이라는 정치적 효능감을 얻은 2030 여성들은 더 이상 '차악 정치'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대체재가 되겠노라 다짐하는 세대다.
그래서 우리는, 파면 이후에도 광장으로의 행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젠더는 정치가 된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개별 성평등 공약들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한편으로, 이를 만들 수 있을만한 인물과 캠프에 표를 던져야 한다.
침묵하는 각 정당의 여성위원회에도 역할을 묻고, 여성 인선이 극도로 적은 대선 캠프를 맹렬히 비판하는 한편 성평등 공약의 존재를 물어야 한다. 거대 정당들의 거듭되는 우클릭 행보를 막을 수 없다면,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 도입 같은 선거제 개혁도 공론화해야 한다. 광장의 행진이 끝나서도,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젠더 문제에 '로우키'로 대응할 계획이라는 이재명 후보 측 계획을 두고 혹자는 당선 이후에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평등을 위한 첫걸음은 다름 아닌 구조적 성차별을 인지하는 '관점'에 있다는 사실과, 한 표가 아쉬운 선거 국면에서도 '로우키'로 일관한 이가 집권 이후 갑자기 젠더 감수성에 입각한 정책을 펴리라는 것은 믿어도 너무 믿는 행태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던 이가 뜬금 "동성애는 반대"라더니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룬 역사를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는 '2025 대선, 여성폭력 해결! 나중은 없다!'는 슬로건으로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이어 30일엔 여성단체들이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요구하는 25대 핵심 젠더정책과제를 발표했다. 이들 요구가 대선에 반영되려면, 광장을 수놓았던 응원봉들이 그 자체로 형형한 눈이 되어 선거판을 지켜보는 수 밖에는 답이 없다. 그래야만 응원봉이 젠더 실종 정치의 판을 깨고 페미니즘 정치의 문을 여는 망치가, 의사봉이 되는 미래를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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