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한국경제신문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경제학자인 앵거스 디턴은 앤 케이스와 함께 2020년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중년 백인 저학력층에서 나타난 사망률 증가에 주목하면서 미국 자본주의가 절망사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극심한 건강 불평등은 병원의 탓이 아니다. 노동시장 붕괴와 교육을 경유한 배타적 계급재생산, 여기에 대응하는 복지 제도의 부재가 축적되어 만들어낸 결과이자 정치적 선택이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를 사랑하는 한국의 어떤 논자들은 자꾸만 이 책의 함의를 "미국처럼 마약 중독 늘어나면 큰일 나"로 축소하곤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 책의 실제 결론은 전혀 다르다. 놀랍게도 디턴은 보편적 의료보장과 공공 교육 확대, 노동조합의 집단적 협상력 강화와 사회 안전망 복원 같은 새빨간 처방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적 박탈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10년 전 예방의학 전공자 둘이 했던 논쟁에서는 둘 다 틀렸다. 한국과 미국 모두 기대여명은 의료가 결정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기여하는 몫이 없지는 않겠지만 의료는 이미 발생한 건강상 어려움을 완화하고 질병과 관련한 고통을 줄이며 아파도 살만한 삶을 보장하는 데에 더 중요하다. 애초에 좋은 의료 체계를 비교하는 데에 기대여명을 끌고 오는 일이 그리 타당한 전략은 아니었단 소리다.
미국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전공의 수련을 하느라 해외 유학을 떠날 겨를이 없는 의사들은 교수가 된 후 곧잘 미국으로 떠난다. 더 최신의 고급 의료 기술과 지식을 익히기 위해서다. 미국의 열악한 건강 수준을 알게 된 이상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의사 1인당 환자 수, 수술 건수가 한국보다 훨씬 적다면서, 게다가 미국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손도 엄청 무디다면서 도대체 뭘 배워 온다는 거야?
미국은 전문성의 수준을 계속해서 높이고 세분화하는 과잉 전문화된 의료를 추구한다. 미국 의학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널찍한 1인실과 한국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환자-의료진 비율, 환자와 상담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는 '고급' 의료는 어마어마한 비용의 청구서와 세트다. 이런 병원으로 의료를 배우러 방문한 한국의 의사들은 더 좋은 진단 기기와 치료 기술, 새로운 장비와 약물에 관심을 기울인다.
세금으로 국영의료체계(National Health Service)를 운영하는 영국의 병원과는 사뭇 다른 한국 병원의 운영 방식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배우는 의료가 한국에서 유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한 사회의 기대여명이 의료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의과학적 발견의 최전선은 아무래도 미국이란 사실을 고려하면, 미국으로 가는 연수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첨단 의료를 추종하는 의사는 제쳐두고,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더 좋은 의료체계, 더 나아가 건강을 결정하는 사회적 구조를 고민한다면 미국에서 배울 점은 따로 있다. 저토록 불평등하고 제도적 의료보장이 미비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온갖 고통과 불행을 꼼꼼히 기록하고 살피는 연구들이 대표적이다. 다양성, 형평, 포용(DEI initiative) 같은 진보적 가치를 의료 및 의학 교육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나, 박탈된 지역사회에서 펼쳐지는 참여적 도시 계획과 건강 돌봄 프로그램 등도 참조할 만한 사례가 될 수 있다.
▲2017년 9월 2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보건의료 집회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업화된 의료의 결과 측면에서도 다양한 배울 점들이 있을 거다. 사람들의 건강과 의료가 큰돈을 들여 사거나, 그 돈이 없으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되었을 때의 곤란과 고통을 미국에서는 어떻게 논의하고 있을까?
미국에서는 의료 불평등에 맞서는 풀뿌리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의료를 기본권으로 재정의하려 노력하며,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의료의 권리는 늘 미국 정치의 핵심 의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줄곧 무상의료를 지지하던 버니 샌더스는 미국 MZ세대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의 오래된 핵심 공약은 바로 '전 국민 건강보험'(Medicare for a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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