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 4대 정 · 부통령선거 민주당 선거벽보. 민주당이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는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세에 몰린 여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는 구호로 응수했다. 민주당은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 후보가 사망함으로써 정권교체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선거 열흘 전인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호남행 열차에서 급서했다. 여당의 이승만과 야권의 신익희-조봉암이 이끄는 3자 구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므로 조봉암 표가 오르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보수정당인 민주당은 신익희 표가 진보 정치가인 조봉암에게 가지 않게 단속했다. 대선 총평을 다룬 그달 23일 자 <동아일보>는 "민주당에서는 조씨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서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수삼차(數三次)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정리했다.
조봉암은 절대 찍지 말라고 두세 번이나 성명을 낸 민주당의 단속은 주효했다. 사실상 신익희 표로 간주되는 무효표가 무려 185만 6818표나 나온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이랬기 때문에 신익희 서거는 조봉암이 아닌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로 인해 이승만의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5·15 선거의 승패를 가늠하는 것은 대통령 선거보다는 부통령 선거로 인식됐다. 대통령 후보를 잃은 민주당도 부통령 선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한층 격렬해진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기붕이 패하고 민주당 장면이 당선됐다. 이 역시 자유당이 패했다는 평가가 나오게 만든 요인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승리는 어부지리였다. 민주당의 선거전략이나 선거운동이 주효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다. 이는 조봉암의 선택이 낳은 결과물이다.
신익희 급서 이전부터, 이승만 독재에 제동을 걸기 위해 민주당과 진보당이 연대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이 강했다. 이런 가운데 신익희 생전에 두 당은 야당연합을 위한 협상에 착수했고, 여기서 조봉암이 파격적인 단일화 제안을 내놓았다. 이승만을 꺾기 위해 자신이 대통령 후보직을 양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 28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출신인 서상일 진보당 선거대책위원장은 조봉암이 신익희와의 회담에서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는 대의 아래 대통령후보를 양보할 용의"가 있음을 표시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신, 조봉암이 요구한 것이 있다. 부통령후보직은 진보당 박기출 후보에게 양보해달라는 것이었다. 민주당 후보 장면의 사퇴를 요구한 셈이다. 위 기사는 "신씨는 즉각적 답변을 피하고 민주당과 협의해서 통고하겠다"고 답했다. 이 협상은 깨졌다. 민주당은 부통령후보직 양보에 동의하지 않았다.
야권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9일이 지난 뒤 신익희가 운명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고 부통령 선거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아가자 조봉암은 새로운 선택을 내놓았다.
그는 '진보당은 부통령후보만 내겠다'던 입장을 거두고 '진보당이 부통령 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5월 11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진보당 상임위원회는 5월 9일 오전·오후의 장시간 회의를 거쳐 부통령 선거 포기를 결의했다. 이날 박기출 후보는 불출마를 공식화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야권의 부통령 후보는 장면 민주당 후보로 사실상 단일화됐다. 무소속 이범석, 대한국민당 윤치영, 조선민주당 이윤영, 무소속 백성욱도 있었지만, 이들은 군소 후보들이었다. 박기출의 사퇴는 사실상의 단일화였다. 부통령직이라도 확보해야 이승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여론의 희망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무능·독재와 불법 비상계엄 등등에 더해 거짓과 식언까지
한편, 진보당의 부통령직 포기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었다. 야권이 단일화에 성공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민주당 표와 반이승만 표를 흡수하기 위한 진보당의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신익희 표가 조봉암에게 가지 않게 단속하는 민주당의 선거전략을 방해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의 단일화 뒤 부통령 선거에서 이변이 연출됐다. 민주당 장면은 401만 2654표로 46.4%를, 자유당 이기붕은 380만 5502표로 44.0%를 득표했다. 근소한 표차로 장면이 이기붕을 꺾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215만 표를 얻은 진보당이 부통령 선거에도 후보를 냈다면 장면과 이기붕의 순위가 역전됐을 확률은 거의 100%다. 민주당의 호응 여하에 관계없이 사실상의 단일화를 이룬 진보당의 선택이 장면 후보의 승리 원동력이었다.
이기붕은 부통령선거 패배 직후에 국회의장이 됐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수개월간 무단결근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패배가 진보당의 '농간'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다. 민주당이 잘해서 자신이 패한 것이라면 충격이 덜했을 수도 있다. 자유당 정권이 빨갱이로 폄하하는 진보세력 때문에 졌다는 사실이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무능과 독재, 불법 비상계엄, 민간인 학살, 친일청산 방해, 분단 및 냉전 조장 등으로 민심을 잃은 이승만은 1954년에 3선 출마를 위한 개헌을 강행했다. 그랬던 그가 1956년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민주주의국가에서 누가 3선을 하냐'는 식으로 딴전을 피웠다. 그해 3월 12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3선은 민주주의국가에 드문 예"라며 후보직 수락을 거부했다. 그런 뒤 4월 5일에 후보로 등록했다.
조봉암이 민주당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박기출 후보를 사퇴시켜 장면을 당선시킨 것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나라를 온전히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판단 때문이었다. 진보당과 조봉암만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무능·독재와 불법 비상계엄 등등에 더해 거짓과 식언까지 일삼는 이승만에 대해 한국인들은 염증을 냈다. 그런 국민적 정서가 추동력이 되어 신익희 급서 뒤에 진보당이 부통령후보직을 사퇴하고 이에 힘입어 '대통령은 자유당에서, 부통령은 민주당에서' 나오는 이례적인 상황이 형성됐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