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베이스원의 국제 성소수자 팬덤인 레인보우 제로즈가 한국 성소수자 인권단체 후원하기 위한 기부금 모금 행사로 모인 금액을 발표하는 SNS 이미지
Rainbow Zerose
케이팝을 사랑하는 해외 팬들이 한국 성소수자 인권단체에 기부한다? 단어의 조합부터 엉뚱해 보이는 이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렇다. 얼마 전 그룹 제로베이스원의 해외 성소수자 팬덤인 '레인보우 제로즈'가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단체를 대상으로 한 기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은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지원하는 비온뒤무지개재단과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센터 띵동과 HIV/AIDS 지원 센터 아이샵에 각각 기부금을 전달했다. 레인보우 제로즈는 2024년부터 이 기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첫해에 2000달러(약 287만 원)의 기부금을 모았고 올해는 그보다 두 배에 달하는 4000달러(약 575만 원)가 모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2차 창작이 활발한 팬덤 특유의 문화와 연관이 있다. 나는 며칠 전 기부 감사 영상 전달을 계기로 레인보우 제로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운영자와 메시지를 나누었다. 운영자는 성소수자 팬덤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프로젝트가 어떻게 가능한지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설명에 따르면 팬픽(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특히 그룹 구성원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 행위), 팬 아트(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콘텐츠에 영감을 얻어 시각 예술 형태의 2차 창작을 하는 행위) 등의 2차 창작 행위는 해외 팬덤에서도 활발하고 특히 제로베이스원 해외 퀴어 팬덤 내에는 재능 있는 창작자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2차 창작 문화는 기부에 어떤 기여를 할까. 팬덤 문화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신기한 이야기겠지만 팬덤의 활동력이 활발하고 2차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속에서 인기 작가가 탄생한다. 즉 팬덤 활동을 하다 자신의 팬이 생기는 셈이다. 그리고 팬들은 실력 있는 작가가 자신이 보고 싶은 이야기나 관계를 써주거나 그려주길 바란다.
레인보우 제로즈의 후원 프로젝트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팬들이 주요 2차 창작 작가들에게 입찰할 수 있는 티켓을 판매한다. 그리고 입찰 후 당첨된 팬들은 작가에게 창작해 주길 원하는 주제와 이야기를 전달한다. 티켓을 많이 구매해서 입찰을 많이 할수록 당첨 확률도 높아진다. 말하자면 추첨권 판매를 통해 기부금을 조성하는 셈이다.
그런데 왜 기부를 그것도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단체에 하는 걸까. 레인보우 제로즈 운영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들에겐 두 가지 정체성이 균일하게 중요했다. 자신이 특정 가수의 팬덤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 사실 이 두 가지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레인보우 제로즈의 운영자는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지닌 성소수자 팬들이 팬덤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그룹으로서 만들어내는 강력한 관계에 동일시를 하거나 혹은 거기서 영감을 얻는다고 전했다. 케이팝 아이돌들이 이분법적인 성역할이나 성별 정체성을 해체하고 거기서 탈피하려 한다는 분석은 지금까지 자주 있었다. 그리고 케이팝이 해외에 진출한 이래로 이를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향유해온 것이다.
해외 성소수자 팬들에게 케이팝 팬덤이 지닌 의미
제로베이스원 해외 팬들은 재미 삼아 비공식적인 인구 조사를 시행한다고 한다. 그 결과에 따르면 국제 제로베이스원 팬덤의 50%는 성소수자다. 공신력 있는 조사는 아니지만 이 수치를 사실로 간주하지 않더라도 팬덤 내에 성소수자가 얼마나 있는지 가늠해 볼 기준 정도는 될 수 있다. 저런 정도의 조사에 50%가 나왔다면 성소수자 팬들이 팬덤 내에서 적어도 소수는 아닐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성소수자 팬들도 스스로 저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레인보우 제로즈의 운영자는 자신에게 팬덤 활동이 소중한 건 이 공간이 성소수자에게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건 단순히 팬덤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성소수자로서 강한 정체성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팬덤 단위로 강력하게 결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생각보다 한국에 관심이 많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특이한데, 우리가 마블 영화를 좋아한다고 그 때문에 미국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상하건대 이는 특히나 최근 들어 아이돌들이 자기 생활과 밀착된 콘텐츠를 팬들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기획사가 자체 제작하는 이 콘텐츠를 통해 팬들은 아이돌과 만나고 그들이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는지, 어떤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는지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케이팝 아이돌들은 기본적으로 활동 근거지를 한국으로 두고 있다. 즉 스타와 팬이 공유하는 많은 것이 한국에 있다.
때문에 많은 경우 케이팝 해외 팬들은 레인보우 제로즈처럼 자신의 아이돌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는지 궁금해하고 실제로 알아보기도 한다. 레인보우 제로즈는 프로젝트 홈페이지에서 왜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는지 이유를 밝혀놓았다. 읽어 보면 거의 한국 성소수자 인권 현황 보고서 요약에 가깝다.
이들은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정치의 무관심 속에서 보수 개신교계의 증오 선동에 고통받고 있으며 구조적 차별에 직면해 있음을 언급했다. 또한 트랜스젠더들이 존재조차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점도 짚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무산되는 문제와 지자체들이 퀴어문화축제 개최를 방해하는 문제도 비판했다. 심지어 성소수자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팬들의 창작물에서 각광 받고 있지만 실제 당사자들의 삶은 그러지 못하다는 점도 지목했다. 이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얼마 전 케이팝 그룹 저스트비의 멤버 배인이 공연 중 무대에서 자신도 성소수자 공동체 일원이라고 커밍아웃했다. 나는 밤늦게 이 뉴스를 본 후, 다음날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느라 소식을 거의 잊고 있었다. 다시 이 뉴스를 떠올린 건 레인보우 제로즈의 운영자와 대화를 나누면서였다. 그는 나보다 더 기뻐하며 이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아이돌이 되길 희망하는 성소수자들이 진정한 자신을 안전하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팀원들이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지원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를 만들고 그 분야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향유하고 한국 아이돌들의 팬이 되는 것에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 건 이들이 생각보다 한국에 관심이 많으며 자신의 아이돌이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에 살 수 있도록 이 사회에 개입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어떤 한국을 보여주고 싶은가.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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