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1일 늦은 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이 서울로 들어서는 서초구 남태령고개에서 경찰에 막힌 모습. 농민들이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가운데, 서울 도심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수백명이 합세해 함께 농성했다.
권우성
윤석열 내란 국면에서,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했던 사건이 '남태령 대첩'이었다. 엄동설한의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에 농민들의 트랙터와 화물차 약 80대가 경찰들 차벽에 막혀 멈춰 섰다. 이들이 고립됐다는 소식을 X를 통해 전해 들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1박 2일의 대치 끝에 트랙터는 한남동 관저까지 행진했다. 처음 농민들의 '상여 투쟁'을 제안하는 동시에, 트랙터 행진이 경찰 차벽에 막혔다는 소식 전반을 실시간으로 전한 이가 바로 후주씨다.
"국민의힘 장례식처럼 근조 화환이 (시위의 도구로) 유행했을 때, 이제 그러면 농민 운동 하시는 분들은 '상여를 들고 나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뜨거워져 있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귀가 열려 있을 때잖아요. 센세이션한 광장의 모습이 나오면 사람들이 열광하던 때였고요. 또 타이밍이 선결제에 대한 불신이 생기던 때였어요. '선결제를 했는데 먹튀를 했다', '커피를 폐기했다'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이제 각계의 투쟁 단위에 후원하자, 이런 게 올라왔을 때라 그렇다면 전농도 한 번 후원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
내가 만난 '남태령 현장'에 있었던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향연님의 트윗을 보고 갔다"고 말했다. 곧 광장에서 농민들 트랙터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대에 부풀었다가, 비교적 평온한 경복궁 앞 집회와 달리 경찰들이 폭력적으로 진압에 나섰다는 남태령 사이의 '낙차'를 느꼈다는 것이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던 농민과 여성·퀴어 청년들이 연대한 남태령의 기적에 대해 후주씨는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 탓'이라고 말한다.
"저는 '남태령'이 계엄 이후에 벌어진 첫 비상 상황이라고 보거든요. 공권력과 시민들의 직접 충돌이 있었던 현장이자, 우발적이고 기획되지 않은 현장이었어요. 그 부분에서 충격을 받은 청년들의 감정이 되게 강렬했어요."
1988년생 동갑내기인 후주씨와 나는 20대를 '이명박근혜' 정권으로 보내며, '명박산성'이나 고 백남기 농민을 사망케 한 물대포, 캡사이신에 대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국가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없는 20대 초중반,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아마 이것이 '처음 본 경찰의 폭력적인 모습'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르신들을 때리고, 트랙터를 부숴서 잡아 끌어내리는 그 스펙터클이 영상에 잡혔잖아요. 거기에서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청년들은 사람을 연행해 가는 용도인 일명 '닭장차'라 하는 것들의 이름과 용도조차 모르면서, '순도 100%의 분노'로 무장한 경찰들에 맞섰다고 후주씨는 전했다.
"정말 원론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이 이럴 수는 없다'면서, 이상적이고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 사회를 보시더라고요. '지금 농민분들을 폭행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 행사를 막는 사람들에 항의하러 온 건데 우리가 무슨 죄냐, 경찰들이 잘못하는 것 아니냐'라며 막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분들도 바들바들 떨면서도 '부당하다. 이거 잘못됐다.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는 거예요. 우리 세대도 캡사이신 맞으면서 경찰에 화내고 대들고, 경찰 차벽에 스티커 붙이고 그랬었잖아요. 그랬던 생각이 나면서 조금 놀라면서도 '맞지, 이 말이 맞지' 싶었어요."

▲지난해 12월 22일 남태령 집회에서의 김후주씨.
김후주씨 제공
외로운 이들이 느낀 생경한 감각 '연대'
그는 남태령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이 모처럼 '연대'라는 감각을 느낀 공간으로 기억한다.
"소위 학생 운동, 사회 운동이라는 것과 공동체성이 단절됐던 시기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명박근혜' 때부터 어떤 반정치, 반지성주의가 생겼고 학생 운동의 맥이 끊겼고요. 그것의 쐐기를 박은 게 코로나라고 봐요. 대부분의 '말벌 동지'들은 극도의 고독감, 외로움을 겪고 있었는데 사회적으로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같이 얘기하거나 조언을 얻거나 같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던 친구들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그 안에서 계속 부글부글 끓고 썩고 문드러지고 있었는데, 그게 딱 터진 게 계엄이라고 보여요.
제가 광장에서 만난 친구들 가운데는 이번 광장이 생애 첫 시위인 분들이 많았는데요. 그들 경험에 비췄을 때는 충격적이었을 거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연대'라는 감각,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도움이 될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감각이 굉장히 생경했을 거 같아요."
"박근혜 정권 당시 이화여대 미래라이프 설립 반대 시위를 떠올려보면, 나름의 전략을 가진 여성 시위였지만 반 운동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과 암이 있죠. 극도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얼굴 없는 시위'였잖아요. 절대로 친목이나 커뮤니케이션 공동체 같은 게 만들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 측면이 있고요. 그런 식으로 궁지에 몰렸던 청년 여성들이 많았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 갈증을 느꼈던 친구들이 이번에 나왔다…"
스피노자를 연구한 10년 차 농민의 정치

▲지난 21일 서울 은평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김후주씨.
이슬기
올해로 10년 차 농민인 후주씨는 본디 스피노자로 석사 논문을 쓴 철학도였다.(가톨릭대 철학과 석사 과정 졸업) 그의 석사 논문 제목은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민주주의적 자유개념에 대한 의의와 해명'이다. "소위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자유'라는 개념을 자꾸 우파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을 한 논문이었어요."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던 2016년, 그는 뜻밖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K-장녀'의 순리대로 배 농사를 물려받게 됐다. 그가 운영하는 주원농원은 국내 최대 유기농 배 과수원으로, 5만여㎡(1만 5000평)에 달한다. 그는 트위터에 남태령 관련 소식을 알릴 때 "과수원의 배를 영업하는 느낌으로" 했다고 말했다.
농업 정책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일원이었다. 지난 3월 발족된 국민주권전국회의(주권회의)의 상임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새로운 풀뿌리 시민주권운동을 표방하는 주권회의는 개헌에서부터 주민자치 등 각 분야 주권재민의 실현에 관심을 둔다.
그에게 내란 국면 내내 현격한 의견차를 보였던 반대편 광장에 있던 이들과 대화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
"예수님, 부처님, 소크라테스 반토막이 와도 완전한 봉합은 힘들겠죠. 소통이 전제가 돼야 설득을 하든지 할 텐데 그게 안 되는 상황이고요. 최대한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 커뮤니케이션의 재생이라고 봐요. 한동안 '공동체'라는 말에 질색팔색하면서 계산적인 모습들을 보였더라도, 이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건 틀렸다, 인간은 상호 호혜적일 때 기쁨을 느낀다는 걸 남태령 같은 공간에서 느끼면서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저는 그런 것들을 더 확산시키고자 하는 열망이나 욕구 같은 게 작동하고 있다고 봐요.
내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감각, 다른 사람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내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걸 조금이라도 해결한다는 느낌이죠. 내가 직접 내 몸을 가지고 현장에 가서 해결하고 실천할 때만 그게(감각이) 오잖아요. 현장에서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같이 할 때 느끼는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고 재생산해서 이걸 일상으로 가져와야죠."
'나중에 정치' 같은 광장 이후의 정치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광장의 목소리라든지 사회대개혁에 대한 요구를 민주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계엄을 맞이할 수 있다', '내란을 제대로 청산하고 개혁을 완수하려면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민주당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아요. 제가 봤을 땐 (당에서도) 그걸 아예 싹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그의 석사 논문 한 토막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이성에 부합하는 긍정적 감정들이 부정적 감정들을 압도하고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항상 악보다 선의 관념을 따르게 된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대면해 제안하고 설득하는 원동력에 대해 그는 "비위가 좋다"라며 웃었다. 사람의 선함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결실들을 따라 조금씩 전진하는 것, 그것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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