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서울공항에 도착해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연합뉴스
전 세계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약자의 편에 섰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여준 그의 공감에도 감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뿐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이전의 교황들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다.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이 대립하는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 지도자가 세계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교황들은 종교적 메시지뿐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도 낸다.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 반할 때도 많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도널드 트럼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2016년 대선 때는 "다리를 만들지 않고 벽만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간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말로 트럼프 후보의 이민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트럼프의 종교적 정체성을 부인하는 발언이 될 수 있었다. 트럼프는 "종교 지도자가 어떤 사람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수치"라며 발끈했다.
교황은 2019년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 장벽 건설과 관련해 "벽을 쌓음으로써 영토를 보호하려는 새로운 풍조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라며 "자신이 세운 벽에 포로가 될 것"이라는 말로 트럼프의 어리석음을 질타했다.
파시즘 정권과 타협한 교황청
바티칸 교황들이 약자의 편에 서서 최강국을 자주 비판하고 그러면서도 세계적 권위를 견고히 유지하는 지금의 현상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100년도 넘지 않은 일이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지 2년 뒤인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했다. 로마제국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 제국은 서유럽에서 황제 칭호를 독점했다. 이 나라가 붕괴하기 전까지 교황은 로마제국 계승자의 보호를 받는 한편 그 계승자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유지했다.
그 시절 교황은 유럽 내에서는 힘을 갖고 있었을지라도 세계적 권위는 얻지 못했다. 유럽에서 행사하는 힘도 대중의 자발적인 존경심에 기초한 것이기보다는 현실의 정치권력과 연계된 데서 나왔다.
신성로마제국을 잃고 우여곡절을 겪던 교황은 20세기에 들어서는 파시즘 정권과 제휴했다. 1922년 10월 28일 극우 사병집단인 검은셔츠단의 로마 진군에 힘입어 집권한 무솔리니는 가톨릭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제휴는 이탈리아 통일이 일어난 1870년 이후로 교황청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다. <이탈리아어문학> 2019년 제58집에 실린 허유회 부산외대 교수의 논문 '이탈리아의 교회와 국가 관계 타입 연구: 파시즘 시기를 배경으로'에 이런 설명이 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확산되면서 교황령은 신생 이탈리아왕국에 접수되어 갔는데, 1870년에는 수도 로마가 점령되면서 이탈리아왕국은 교황령을 요구했고 교황청은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한 위기는 교황청과 무솔리니의 제휴가 이뤄지는 배경이 되었다. 위 논문은 1922년의 로마 진군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무솔리니는 당시 가톨릭 고위층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이런 제휴는 1929년 2월 11일의 라테란협정으로 제도화됐다. 이 협정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의 국교임을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의 절대적 주권을 승인했다.
히로히토 및 히틀러와 더불어 무솔리니는 제국주의 세계 침략의 장본인이다. 그런 무솔리니와의 연대를 통해 교황청은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켰다. 물론, 무솔리니를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판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제휴가 파시즘 정권의 해악성을 희석해 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무솔리니와 협력할 당시의 교황청은 히로히토가 강행하는 신사참배도 허용했다. 1936년 5월 26일에는 이에 관한 교황청의 공식 결정이 있었다. <교회사연구> 2020년 제56집에 수록된 유가별 한국외방선교회 신부의 논문 '교황의 신사참배 허용의 최후 과정'은 그 같은 결정이 약소민족의 입장은 물론이고 신학적 입장에도 서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신사참배 사안을 제국주의국가 입장에서 애국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한 교황청의 판단과 일제 식민지배 수단에 (대한) 동조 정신이 내포된 신사참배 문제를 식민지배에 처한 민족의 애국주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신사참배 허용에 앞장선 한국 내의 주교들과 교황사절의 판단에는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변화... 가톨릭이 달라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지 사흘째인 지난 23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일반인 조문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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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교황들은 인류의 보편적 존경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것이 확 달라진 데는 1962년 10월 11일 개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할이 컸다. 그로부터 4년 전에 즉위한 교황 요한 23세가 가톨릭 개혁세력과 함께 주도한 이 공의회는 교황청이 세계적 보편성을 추구하며 오늘날의 존경을 받는 토대가 됐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였던 전광진 신부가 2009년 7월호 <사목정보>에 기고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가톨릭교회를 구하다'는 "비오 9세(1846~1878) 이후 교황들은 100년 동안 과거의 권위를 지키려는 방어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대량 교회이탈로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한 뒤 이런 상황에 제동을 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들을 요약한다.
그 속에는 현대 세계에 대한 적응, 대화와 자성,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 인정, 종교의 자유 인정, 권위주의 철폐 등이 있다. 전통만을 고집하지 말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자, 세상을 상대로 지시하지 말고 세상을 협력자로 대하자, 꼭 가톨릭이 아니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 다른 종교의 가치도 인정하자,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를 버리고 봉사자의 자세를 취하자는 등등의 정신이 제2차 공의회에서 강조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한 오늘날의 가톨릭 지도자들에게서는 종교 간의 벽에 구애됨 없는 개방성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제2차 공의회는 가톨릭이 그런 길을 향해 집단적 노력을 하는 계기가 됐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교수인 루보미르 차크 신부는 <누리와 말씀> 제33호에 기고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신학의 쇄신'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신학자들 그리고 신학적 가르침과 글들이 모두 서양에서 기원하고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면, 공의회 이후에는 자신들의 사회문화적인 내적 분위기와 자신의 교회공동체가 살고 있는 사회적 배경에서 신학적 탐구를 진행하기를 원하는 아시아 출신의 신학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뒤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비서구적 신학의 탄생과 발생을 신학 자체의 쇄신과 더 큰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겼고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라고 언급한다. 유럽의 문화적 토양을 기초로만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던 방식에도 혁신이 일어났던 것이다. 논문은 제2회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소개한다.
"모든 민족들의 종교 영역 안에서 숙고되고 해석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교 진리는 자신이 지닌 모든 가능성들이 인식되지도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라틴문화의 그리스도교 신자는 반투문화의 사람들에게 문화적 이식을 야기함 없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아프리카 사람은 자신의 모국의 문화와 형태들을 부과하지 않고도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인도인과 아프리카인이 중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들에게 전하게 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한 진리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가톨릭이 보편적인 인류문화에 기초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시작됐던 것이다.
이 노력은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로마교황청과 교황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했던 가톨릭의 집단적 노력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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