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4 18:58최종 업데이트 25.04.2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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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미사'에 앞서 카퍼레이드를 하며 신도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교황의 옷에는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리본' 배지가 달려 있다.이희훈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슴에는 줄곧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었습니다. 직접 유가족을 만나 위로의 말도 건넸습니다. 이 같은 행보가 '정치적'이라고 오해받는 것을 우려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정훈님,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중립적이지 않은 태도'가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질서나 관습을 공고하게 다지는 것보다, 고통받는 이들 옆에 서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셨던 분이니까요.

특히 성소수자에 관한 가톨릭의 인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인해 전면적으로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2013년 7월 취임 넉 달 만에 "만약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면서 하느님을 찾고 선의를 갖고 있다면 내가 누구라고 그를 심판하겠는가"라는 발언을 하고, 2020년엔 "동성애자들도 주님의 자녀들이며 하나의 가족이 될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2023년 11월에는 교황청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세례가 가능하다고 밝혔고, 12월에는 동성 커플에 대한 사제의 축복을 허용했습니다. 이에 한국에서도 2024년 2월 동성 커플에 대한 첫 축복 기도가 이뤄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성당)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성소수자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의 은총과 자비가 가닿아야 할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이동환·남재영 목사의 출교 조치를 한 것과도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보수 신학자의 참회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헤이스 부고 기사뉴욕타임스 홈페이지 캡처

그런데 지난해 미국에서는 연합감리교 목사이자 듀크대 신학대학원 학장을 지낸 세계적 신학자인 리처드 헤이스가 '동성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전면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제당한 수많은 성소수자들의 고통을 야기한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 (지난해 10월 CNN 인터뷰 중)

<한국일보>는 지난 2월 부고 기획 '가만한 당신'을 통해 리처드 헤이스를 조명했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리처드 헤이스는 1996년 <신약의 윤리적 비전>이라는 책에서 동성애를 "신의 사랑의 목적에서 멀어져 버린, '망가진 백성'임을 보여주는 여러 비극적 징후 중 하나"라고 썼습니다. 문제는 리처드 헤이스가 진보 신학계에도 영향을 미칠만큼 저명한 학자였고, 이 책 역시 미국 <크리스천 투데이>에 의해 20세기 고전 필독서로 선정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그가 아들과 함께 낸 책 <신의 자비의 확장(The Widenig of God's Mercy)>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신은 동성애를 죄악시하지 않는다"라며 성경의 구절을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성소수자 신자들을 배척하는 보수 교회들의 행태, '교회 내 소외된 성소수자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면적으로 겪은 깊은 성찰'(미주 뉴스앤조이)이 그가 이전과는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게 된 이유였다고 전해집니다.

지난해 10월 댈러스 월셔 침례교회에서 열린 센터피스 콘퍼런스에 참석한 리처드 헤이스는 성소수자 신자들이 모인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부고가 "동성애자 포용에 반대했던 신약학자 리처드 헤이스가 별세했다"가 아니라 "동성애자 포용에 대한 생각을 바꾼 신약학자 리처드 헤이스가 별세했다"가 되길 바란다고요. 그리고 실제로 췌장암이 재발해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리처드 헤이스의 죽음을 알리는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의 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처드 헤이스, 76세로 별세: 놀라운 신념의 변화를 겪은 신학자 (Richard Hays, 76, Dies; Theologian Who Had Stunning Change of Heart)'

윤여정씨의 고백

배우 윤여정씨가 지난 14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영화 <결혼피로연> 시사회에 참석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배우 윤여정씨의 고백도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결혼피로연> 개봉을 앞두고 한 국외 매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큰 아들이 '동성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결혼 피로연>에서 그는 한국계 동성애자 남성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할머니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홍콩 일간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제 첫째 아들은 2000년에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 뉴욕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열어줬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아들보다 사위를 더 사랑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고요.

미국 주간지 <버라이어티>와 한 인터뷰에서는 "이 영화에서 내가 (동성애자) 손자에게 말하는 대사인 '(네가 누구든) 너는 내 손자야'라는 말은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며 "그 말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는 "윤여정 배우의 멋진 결심은 성소수자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라는 성명을 냈습니다. 행성인은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커밍아웃만큼이나 성소수자 부모의 커밍아웃 또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연예인의 커밍아웃은 그 자체만으로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힘이 된다. 큰 결심을 내린 윤여정 배우에게 힘찬 환영과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윤여정씨의 말처럼 "한국은 (성소수자에겐) 매우 보수적인 국가"(미국 주간지 <피플> 인터뷰)이고, 2022년 6월 기준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지수(무지개지수)는 10.56%에 불과해 국제사회에선 하위권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고백이 더 많은 성소수자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용기 없는 정치인들

이재명·김경수·김동연 예비후보가 19일 충북 청주시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충청권 합동연설회에서 박수치고 있다.남소연

프란치스코 교황, 리처드 헤이스, 윤여정.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보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기는커녕 절망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용기'였습니다. 그런데 정훈님, 정작 조기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에는 이런 '용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무지개 깃발을 든 퀴어들이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나와 '윤석열 파면'을 이끌어냈음에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김광진 전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동성애 차별을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언론에 밝혔다가, 전남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 개신교 세력의 표적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지역구(순천) 경선 탈락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패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정치꾼이 아니라 정치인으로 살겠다"라고 밝히면서 말입니다.

사실 김 전 의원 정도의 소신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른 법안들은 사회적인 논란이 있더라도, '추진하겠다' '통과시키겠다' 확언하는 국회의원들도 유독 차별금지법 앞에서는 말을 아낍니다. 그래서인지 22대 국회에선 단 하나의 차별금지법 법안도 발의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서는 예비후보들의 태도는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김동연 예비후보는 "모든 차별은 없애야 하지만 '법'으로까지 가는 것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프레시안), 김경수 예비후보는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도 합의 없이 만들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긴다. 차별금지법도 그렇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제정해나가야 한다고 본다"(한겨레)라고 밝혔습니다. 이재명 예비후보는 경선 기간에 내놓은 입장은 없으나, 지난해 10월 차별금지법이 우선 과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사회적 대화나 타협이 성숙된 다음에 논의해도 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셋 다 대동소이합니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인종, 출신 지역, 종교, 사상,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일어나는 차별을 금지·예방하는 법입니다. '고용, 재화 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 공공서비스의 제공·이용 영역'에 적용됩니다(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시안 기준). 법안에 명시된 '차별'의 항목 중 '성적 지향'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보수기독교 단체에서는 오랫동안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는 완전한 왜곡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차별금지법만으로는 사각지대가 생기기 때문에, 다양한 혐오·차별에 대응하기 위해선 차별금지법에 더해 부문별로 별도의 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첫발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윤석열 탄핵 과정에서 위력을 떨친 극우 세력을 보면, '반동성애' '반이슬람' '차별금지법 반대', 좌파척결'이라는 구호 아래 보수 개신교가 주도하는 모양새입니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 '극우리포트- 성소수자 혐오에서 내란옹호까지' 참고).여기에 최근에는 '반중'이라는 구호까지 더해졌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양꼬치 거리'의 반중 시위는, 소수자·약자를 향한 극우들의 공격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합니다.

비상계엄을 옹호하고 극우와 손을 잡은 정치 세력에게는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없더라도, 헌법을 수호하는 상식적인 정당이라면 극우세력을 향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조치가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다원성을 해치는 '혐오할 자유'는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법제화하지 않는다면, 극우는 결코 겁먹거나 움츠러들지 않을 겁니다.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사회적 합의나 '시기상조' 같은 말은 지금 이 순간도 차별을 마주하고 있는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생각하면 참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는 정치, 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하는 정치가 무슨 수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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