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권우성
내란 사태와 탄핵 가결 이후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보인 추태들은, 시스템을 제대로 운용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그것을 무시하고 부정해버리면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즉시' 임명하지 않고 석연찮은 이유로 미뤘지만,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탄핵으로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 외에 없었다. 그 뒤 최상목 부총리 겸 대행은 아무런 설명과 논리 없이 국회 몫의 헌법재판관 3인 중 2인만 임명하는 불가해한 일을 벌였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명백히 위헌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최상목 부총리는 '헌재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끝내 미루다가 나머지 1인을 임명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대행으로 있는 동안 '걸어 다니는 위헌'이라는 오명마저 얻으면서도 아무런 처벌 없이 멀쩡히 장관 겸 부총리직을 유지했다. 사실상 위헌 현행범이지만 명문화된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처벌조항이 없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공직자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답으로 공직자들이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을 시 바로 파면되거나 처벌받는다는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위와 같이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이 헌정질서와 법치를 내놓고 무시하는 일이 앞으로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그들이 법질서를 우회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상상해서 아주 촘촘한 그물망을 짜듯이 세밀한 디테일까지 고려해서 법안을 작성해야 할 테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소위 '정치의 사법화'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직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위법이냐 위법이 아니냐에만 맞춰지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한국 정치에 남는 것은 이른바 '법 기술자'들이 법망의 사각지대를 헤집고 다니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경쟁 진영에게는 극도로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피선거권을 박탈시키는 공세뿐이다. 결국, 지난 3년간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노정한 그 모든 추태의 훨씬 더 심각한 양상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볼로냐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킹스 칼리지 런던 법학 명예교수인 신디 L. 스카흐(C.L. Skach)는 그의 저서 <하우 투 비어 시티즌, How to be a citizen>에서 성문화된 규칙 및 법질서의 존재가, 사람들이 규칙 없이 내던져지면 서로 죽이고 훔치는 야만인으로 되돌아갈 거라는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칙, 더 세목으로 들어가는 법의 제정으로 해결하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은 것은 시민들이 정치 엘리트와 사법 엘리트에게 더 의존함에 따라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스카흐는 의원내각제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바가 없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체제의 비교를, 훗날 스카흐 자신이 부정하면서 규칙·제도·체계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기대와 의지 자체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글자로 쓰인 규칙만 잘 준수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래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질문하는 법을 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카흐는 민주주의의 리더십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입헌주의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념을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키케로(고대 로마의 정치가)의 의무론에서 가져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류애와 동료에 대한 의무, 공감과 연민을 포함한 '태도'다.
'헌법'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 '시민성' 결여된 정치인 축출해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형사재판 두 번째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 사람이 개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공동체에 대한 태도로 직결되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몰인정, 무시, 일말의 폭력성을 노정하는 사람은 그 어떤 전문성이나 능력, 스펙을 가췄는지와 상관없이 지도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완전한 자격 미달이라는 명확하고 엄격한 도덕적 판단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정치인들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 제반 사안에 대한 판단을 법 조항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형성해 온 고유의 기준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공직자들을 감시해야 한다. 이것이 헌법학자 스카흐가 제안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적 입헌주의의 출발점이다.
어떤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일부 '제도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제도적·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시스템과 구조의 문제로 환원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과 구조가 그대로라면 어느 세력이 집권했든지 간에 똑같은 비극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상투어가 양당 중 누가 당선되든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부정하고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며 시민성을 완전히 결여한 사람들이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벌어지는 참극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조기 대선이 치러지기 직전에도 개헌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때 유시민 작가는 "헌법이 잘못해서 이 사태가 났나. 헌법 잘못이 아니라 헌법을 제대로 운용 안 해서 탄핵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제가 제왕적이라서 윤석열이 파면된 것이 아니라 그가 대통령제를 제왕적으로 운용해서, 헌법을 무시하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부정하고 국민 앞에 군림하려 했기 때문에 파면된 것이다.
결국 정치와 통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을 대하는 태도,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위시한 '시민성'의 여부를 정치인에 대한 평가의 제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기준에 완벽히 미달한 사람들이 아직 한국의 정치판에 남아있다. 이들을 축출하는 일부터 완수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더 나은 제도와 체제를 위한 논의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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