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5 15:00최종 업데이트 25.04.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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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내부. 앞에 보이는 것은 임금이 앉는 어좌다.연합뉴스

조선왕조는 임금에 대한 탄핵 절차를 성문 법률로 정해두지 않았다.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군주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비상사태하의 군주 교체가 신속히 진행됐다. 군주 폐위에 관한 관습법 혹은 관행이 단순했던 데도 원인이 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하에서는 3대 기관이 탄핵 정국을 주도한다. 대통령을 탄핵심판에 넘기고 심판에 참여하는 국회, 대통령에 대한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 대통령의 직무를 대신 수행하는 대통령권한대행이 상황을 이끈다.


대통령과 관련된 비상시국 권한을 분점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두 행위주체가 이런 정국을 주도했다. 궁궐 점령 등을 통해 정권 장악력을 과시하는 정치세력, 그리고 왕실을 대표해 비상대권을 행사하며 군주 교체를 승인하는 대비다. 전자는 실질적 최고 권력을, 후자는 형식적 최고 권력을 갖고 시국에 대응했다.

차기 군주와 소통 없이 '반정' 일으킨 신하들

양대 기구의 협업에 의한 비상사태 극복 시스템이 가장 잘 발현된 사례가 1506년의 연산군 폐위다. 중종반정으로 불리는 이 사례에서는 일반적인 역모 사건에서 당연히 등장하는 것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정권교체가 무난히 성사됐다.

비합법적 왕위 교체를 추진하는 세력은 차기 군주와 사전 교감을 해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종반정 때는 그것이 없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진성대군(중종, 당시 18세)이 정변 발생 직후에 자결을 시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변 발생 몇 시간 뒤인 1506년 9월 17일(음력 9.1) 24시 전후에 반군이 진성대군 저택을 에워쌌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수록된 <국조기사(國朝記事)>는 이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진성대군이 "놀라 자결하려 했다"라고 알려준다.

그를 만류한 사람은 부인 신씨다. 신씨는 군사들이 타고 온 말들의 머리가 우리 집 대문을 향해 있는지 반대편을 향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라며 "알아보신 연후에 죽으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말머리의 방향에 따라 포위군인지 호위군인지 판명되니 그것부터 살펴보라는 충고였다. 반정세력의 '3대장'으로 불리는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진성대군과 사전 교감을 나누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산군은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은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다. 이런 관계로도 얽혔기 때문에 두 이복형제는 운명공동체였다.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이자 연산군의 법적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도 연산군과 관계가 괜찮았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현왕후를 모시고 잔치를 했다거나 연꽃 구경을 했다는 기사가 많다. 이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으니, 진성대군이 반군을 보고 극단적 생각을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후궁의 자식이 왕이 된 일은 없었다. 성종 임금의 아들들 중에서 중전의 피를 물려받은 왕자는 연산군과 진성대군뿐이었다. 그래서 진성대군이 목숨을 잃었다면, 반군이 '탄핵소추'를 철회하는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다. 다른 왕족이나 서얼 왕자를 추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반군의 국정 장악력은 떨어지기 쉬웠다.

핵심은 정현왕후의 '승인'

SBS 드라마 <왕과나>에서 정현왕후역을 맡은 배우 이진씨.연합뉴스

그래서 진성대군과의 사전 교감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 반정이 개시됐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반군이 정부군의 군사력을 압도했던 것이 최대 요인이지만, 왕대비인 정현왕후 윤창년(1462~1530)의 역할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결과다. 정현왕후는 실명이 알려진 이례적인 왕후다. 아버지 윤호가 신창현감일 때 태어났다고 해서 창년(昌年)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왕조시대의 대비는 군주가 유고를 당한 긴급 상황에서 비상대권을 행사했다. 영의정이 아니라 대비가 주상의 권한대행자였다. 차기 군주를 승인하는 것도 대비의 몫이었다. 나라의 주권은 왕실에 있다는 관념이 통용될 때였으므로 왕실의 큰어른이 왕실 대표자인 군주를 지정하는 것이 이 시절에는 당연했다. 이때 대비는 헌법재판소장 역할도 했다. 기존 군주에 대한 폐위권은 그에게 있었다.

반군은 거사 초반에 경복궁으로 가서 윤창년 대비에게 반정 사실을 보고한 뒤 신수근·신수영·임사홍 같은 정권 실력자들을 살해했다. 그런 다음, 지금의 헌법재판소 근처인 창덕궁을 장악하고 그곳에 있던 연산군의 신병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윤 대비의 거취는 결정적 의미를 띠었다. 그가 정변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면 반군은 합법적 집권을 포기하고 비합법적 혁명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용이하지 않았다. 왕을 교체하는 데 필요한 준비만 했을 뿐, 나라를 바꾸는 데 필요한 역량은 갖추지 못한 세력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면 궁을 한두 개 점령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전국의 저항세력을 다 감안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대비의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대비의 동향이 중요했다.

역대 군주의 업적을 정리한 <국조보감> 제18권에 따르면, 경복궁에 간 반군은 윤 대비에게 탄핵소추 사유를 설명했다. 임금의 도리를 잃어 정치가 혼란스럽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사직이 위태하다는 등의 사유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군주로 진성대군을 추천했다.

윤 대비는 그런 탄핵 사유에 이의를 걸지 않았다. 연산군의 폭정과 실정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윤 대비는 차기 주상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친아들을 추천하는 반군들에게 "내 아이가 어찌 중책을 감당하겠소?"라며 "지금 세자가 장성하니 승계할 만하오"라는 말로 연산군 세자인 이황을 추천했다. 하지만 윤 대비는 반군의 뜻을 확인한 뒤 진성대군 옹립을 받아들였다.

윤 대비는 연산군을 파면하고 진성대군을 승인함으로써 탄핵정국을 마무리했다. 음력으로 중종 1년 9월 2일자(양력 1506.9.18.) <중종실록>에 수록된 대비의 교지에 따르면, 그는 연산군이 왕의 도리를 잃고 민심을 이반시키며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어리석은 군주라는 이유로 '피청구인 탄핵'을 선고했다. 이에 힘입어 반정세력은 연산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중종반정의 탄핵소추와 탄핵심판은 양력 9월 17일에 시작해 18일에 종결됐다.

사상누각 위에 있었던 연산군의 권력

영화 <간신>의 한 장면. 배우 김강우씨가 연산군을 맡았다.수필름

한편, 직무가 정지됐다가 공식 폐위되는 과정에서 폐주 연산군은 상당히 쿨한 모습을 보였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9월 18일에 반군이 국새 반납을 요구하자 그는 "내가 내 죄를 알지"라며 즉시 내주었다.

조선시대 학자 윤기헌이 쓴 <장빈호찬>에 따르면, 연산군은 반군을 맞닥트릴 때도 쿨했다. '경호처' 직원들이 반군 함성을 듣고 달아나자 "활과 화살을 가져와!"라고 고함치던 그는 상황이 뒤집힌 것을 알고는 "우리 함께 나가서 빌어봅시다"라고 중전에게 제안했다. 중전은 "이렇게 된 마당에 빌어본들 뭐하겠습니까"라며 "그냥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시지요"라고 충고했다. 이 시절의 영부인은 현실 판단이 빨랐다. 그래서 그의 남편도 상황을 쉽게 받아들였다.

연산군이 쿨해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의 시대에는 국가 재정이 궁핍했다. 1392년 건국 이후에 출생한 약 130명의 옹주·공주·왕자가 혼인할 때마다 왕실 토지를 떼줬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왕실 부동산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서 관료기구와 군대를 운용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1.18.) <연산군일기>에도 나타나듯이 지방 유지들의 지지를 받는 홍길동 군대가 지방 관청을 습격하는 일도 많았다. 충청도의 경우에는 홍길동이 쓸고 간 뒤로 세금이 잘 걷히지 않았다. 경제사정과 민심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이 시대에는 무오사화나 갑자사화 같은 유혈 숙청이 많았다. 주로 선비들을 겨냥한 이런 식의 숙청을 통해 연산군은 권력을 강화했지만, 이 때문에 신하들은 그를 믿지 못하게 됐다. 불안을 느낀 측근세력과 기득권층이 반정에 대거 가담한 것은 절대권력 구축이 그 자신을 고립시켰음을 보여준다.

연산군의 절대권력은 사상누각이었다. 재정적·군사적으로 튼튼한 기반 위에서, 또 민심의 지지 위에서 구축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정치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자신도 권력 기반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반군의 등장 앞에서 그는 현실을 신속히 받아들였다.

중종반정은 차기 군주와의 사전 교감 없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차기 군주 내정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뻔했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잘 마무리됐다. 반군의 군사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창덕궁 퇴거를 담담히 받아들인 연산군의 태도와 더불어, 민심과 조정의 대세를 참작해 신속히 파면 결정을 내린 정현왕후의 역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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