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2 06:52최종 업데이트 25.05.02 15:08
  • 본문듣기
새로운 시대정신이자 미래의 침로인 'ESG'가 거대한 전환을 만들고 있다. ESG는 환경(E), 사회(S), 거버넌스(G)의 앞자를 딴 말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세계 시민의 분투를 대표하는 가치 담론이다. 삶에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실천하는 사람과 조직을 만나 그들이 여는 미래를 탐방한다.[기자말]


동국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청각장애 대학생 김아무개씨는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속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학교는 이중 지원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그는 강의를 녹음한 다음 한글로 풀어주는 앱을 이용해 수업 진도를 따라갔다. 이런 과정이 번거로울 때는 교수의 입 모양으로 수업 내용을 짐작하며 공부한다. 팀플을 할 때엔 수어통역사와 함께 해서 그나마 소통의 불편을 던다. 속기와 수어통역 중 김씨는 다른 학생에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수어통역을 선택했다.


김씨는 "장애학생에게는 개별 상황에 맞춘 맞춤형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론 강의에서는 속기 지원이 적절하고, 팀 미팅이나 토론, 발표와 같은 상황에서는 수어통역사의 지원이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는 두 가지 지원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숭실대 2학년인 배아무개씨는 하반신 마비로 인한 중증 지체장애와 장루·요루를 함께 겪는 중복장애인이다. 등교는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한다. 숭실대는 캠퍼스가 작은 편이라 언덕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할 때 살짝 힘든 것 외에는 학교 내의 이동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그러나 정작 강의실에서는 어려움을 겪는다.

"좁은 강의실이 종종 있어요.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다 보니 맨 앞 아니면 맨 뒤밖에 못 앉아요. 혹시 수업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되면 엄청 눈치가 보입니다. 학생들이 수업하다 말고 일어나 책상을 틀어서 통로를 만들어줘야 하니까요."

배씨는 대학 입학 후 식당을 제대로 이용해 본 적이 없다. 숭실대 주변 식당은 대부분 턱이 있다. 식당 내부도 좁아서 휠체어나 보조기기를 사용하는 학생들은 들어가기가 어렵다. 배달이나 편의점 식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안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배씨는 "오래된 건물은 진입 자체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며 "학교 내에 두 개 있는 교내 식당 중 한 곳은 계단 외엔 진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숭실대학교 도담식당. 계단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김세현

제도는 있지만

202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대학생은 약 202만 4000명이고 그 중 장애학생은 9554명으로 전체의 0.47%이다. 이들 중 66.5%는 일반전형, 33.5%는 특별전형으로 입학한다. 전체 장애학생 중 지체장애/뇌병변장애 45.6%, 지적장애 14.3%, 시각장애 13.3%, 청각장애 12.1%, 자폐성장애 4.6%, 기타 장애가 10.1%였다.

장애 대학생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는 분명하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30조는 대학 내 장애학생지원센터 설치를 의무화하고, 제31조는 학습보조기기, 교육지원인력, 정보 접근, 취학편의 등 교육활동 전반에 걸친 편의 제공을 명시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차별을 금지한다.[1]

교육부는 2003년부터 장애대학생 교육복지지원 실태를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교수학습지원센터 등을 통한 학업 전략·기초과목 보완 프로그램 등 여러 지원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에서 예산 부족과 인식결여로 장애학생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신체적·심리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지원 방식은 학생들의 접근성과 활용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2]

미국은 조금 다르다. 재활법 504조와 미국장애인법(ADA)에 따라 장애대학생은 수어통역, 대필, 디지털 교재 제공 등 다양한 학업 조정을 받을 수 있고, 학교가 이행하지 않으면 법적 처벌과 벌금이 뒤따른다.

2021~2022년 학년 미국 전체 고등교육기관(3639개교) 중 11.8%(431개교)에서 신입생 중 장애학생 비율이 10%를 넘었고, 장애학생이 6~9%를 차지하는 기관의 비율은16.1%(585개교)였으며, 장애학생 4~5%는 12.6%(459개교), 장애학생 3% 이하는 59.5%(2164개교)로 나타났다.[3] 하버드대학교를 예로 들면 장애학생을 위해 수화통역, 점자 교재, 시험 시간 연장 등 다양한 학업·생활 조정을 제공하며, 서비스 동물 동반, 주차 위치 우선 배정 등 물리적 접근성까지 고려하고 있다.[4]

왜 여전히 어렵나?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김학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고등교육법 내 장애학생 지원 조항 등 장애대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기본적인 법의 틀은 갖추고 있다"며 "권리 기반 서비스 제공 체계가 이미 존재하지만 적절한 인센티브 설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다수 대학에서 지원센터가 행정기구 성격이어서 전문 인력(사회복지, 특수교육, 심리상담)이 부재하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계약직 중심으로 구성되어 지속성과 전문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산 부족과 효율성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소규모 대학은 인건비 부담으로 자율적 지원이 불가능하고 담당부처인 교육부나 지자체의 일회성 예산 집행은 실질적인 체계 구축에 적합하지 않다. 관련 부처 간 책임 분산도 장애대학생을 위한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결여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5층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더니 구정물이 강의실 복도로 콸콸 흘러 들어왔다. 옥상의 물탱크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강의실 앞문은 열려 있었고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의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뒷문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책상이 빽빽한 그곳 강의실에서 나 혼자 휠체어를 돌려, 책상들을 치우고 강의실을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때 같이 강의를 듣던 학우들, 교수님, 막 도착한 도우미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자신들보다 먼저 나갈 수 있도록 빠른 속도로 책상을 치워주었다. 내가 무사히 강의실을 나간 뒤에야 그들도 뛰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장애학생의 이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장애학생 이동권에 관한 어두운 진실을 보여준다. 외부 도움 없이 스스로 헤쳐 나가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우준하씨는 뇌병변 중증장애를 앓고 있다. 가벼운 이동은 가능하지만, 대부분 전동휠체어를 타고 생활한다. 우씨는 공주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성공회대학교에서 국제문화연구학으로 석사를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 중이다. 우씨는 대학 시절을 이렇게 떠올렸다.

"공주대 인문관은 원래 병원 건물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간이 매우 협소해요. 책상 사이를 지나가기가 힘들었어요. 일반 학생들도 좁아서 몸을 틀어 지나갔어요. 국립대여서 지원이 나름 잘 된 편이지만 만일 장애인이 다른 캠퍼스에서 복수전공을 하려면 어려움이 있었어요. 휠체어로 통학버스에 탈 수 없었고, 캠퍼스별로 행정구역이 달라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도 없었어요."

뇌병변 중증장애를 앓는 우준하씨(가운데)는 공주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성공회대학교에서 국제문화연구학으로 석사를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 중이다. 장애학생의 학습권과 관련하여 대화를 나누고 취재한 김세현씨(오른쪽)와 사진을 찍었다. 왼쪽은 수화통역인.김세현

장애인콜택시는 주로 거주지 및 인근 지역 내 이동을 지원하며, 병원 진료 시를 제외하고는 시외 이동은 지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5] 서울시가 2023년 12월 21일부터 광역택시 예약제를 이용해 운행지역을 경기도 전역과 인천광역시 전역으로 확대했다.[6] 일부 지자체에서는 바우처 택시 등을 통해 시외 이동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장애인 콜택시 지원 정책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시외 운행 차량 수 부족과 긴 대기시간 등으로 실질적으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한 지역 간 이동의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식사의 어려움은 장애인에게 공통적이다.

"공주대 기숙사 살 때 a동 b동이 따로 있었고, a동 지하에 식당이 있었어요. 제 방이 있는 b동 2층에서 식당을 가려면 1층에 내려서 a동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해요. 그냥 걸어가려다가 몇 번 넘어지기도 했어요."

방을 a동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지만, 인원 구성 등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공주대에선 장애지원센터의 도움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성공회대 대학원에선 지원이 만족스럽지 않다.

"제가 속한 동아시아 연구소가 4층에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화장실도 없고요. 그래서 설치 요청을 했는데, 돈이 없다고 거절당했습니다. 대신 따로 공부하는 공간을 1층에 마련해주고 1층 화장실에 비데도 설치해 주었습니다. 같은 대학원생인데, 조교를 못하는 게 좀 그렇긴 하죠."

현재 장애학생지원센터를 통한 지원 대부분은 학부생에 집중돼 있다.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김지혜 교수는 "장애 대학원생은 어떤 제도의 대상도 되지 않고 있다"며 지원 범위를 대학원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간은 인식을 만들고, 인식은 공간을 만든다

장애인의 날을 이틀 앞둔 18일 광주 서구 치평동 광주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고등학교 2학년 때 특강에서 강사님이 말했어요. '여러분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미장애인입니다.' 그땐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인도로 돌진한 차에 치였고, 눈을 떴을 때 저는 중증 지체장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숭실대에 다니는 배씨의 이야기이다. 그 사고 전까지 그는 조심스럽게 살았다. 무단횡단도, 위험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애는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의 2023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선천적 장애인은 11.9%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배씨처럼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된다는 얘기다.[7]

김용구 한국 장애인 인권 포럼 처장은 "장애가 먼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며 "당사자의 강연이나 경험 공유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처장은 "공존의 관점이 필요하다. 장애학생에게 역차별이라니, 특혜라니, 학습권 침해라니 하는 이상한 시선과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국대 김 교수는 "장애학생 학습권 보장을 위해서 실제 장애학생의 만족도, 학업성과, 졸업률 등 정량적 지표 기반으로 정부예산을 대학별로 차등 배분받도록 유도하여 대학이 스스로 질적 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장애유형별 서비스 표준 가이드라인 제정과 적용, 대학 구성원 대상의 인식 개선과 정기 교육을 통해 대학 전체에서 장애학생의 접근성을 보장할 것, 현재의 보편적 예산 신청에 따른 선별 지원 방식을 변경하여 장애학생 1인당 기준 경비를 항목별로 구체적으로 명세화하여 직접 집행 방식으로 변경할 것 등을 강조했다.

인천대 김 교수는 "교육부의 적극적 예산 마련과 장애학생지원센터 직원의 정규직화가 필요하다"며 "장애학생교육 복지평가가 적극적 현실변화를 유도하는 평가로 기능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학습권을 포함해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비장애인은 누구나 미장애인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논리는 효과적이긴 하지만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려해야 하는 게 아니라, '비'와 '미'란 접두사와 무관하게 모두가 보편적 인권을 지닌 인간이어야 한다. 장애인의 날인 20일을 맞아 조기 대선을 앞둔 여야의 대선 후보들이 잇달아 장애인 공약을 발표했다.

글: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김세현 기자(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이윤진 ESG연구소 대표
덧붙이는 글 [1] 2023 장애 대학생 교육복지지원 실태조사 16-21p

[2] 2023 장애 대학생 교육복지지원 실태조사 17p

[3] 2023 장애 대학생 교육복지지원 실태조사 24p

[4] 2023 장애 대학생 교육복지지원 실태조사 23-30p

[5] 서울특별시청 대중교통소식

[6] 서울시설공단 장애인콜택시 소개 및 안내

[7] 장애인 10명 중 8명 '후천적' 발생…우울감 경험, 전체 인구에 2.6배 높아(세계일보)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