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2 20:05최종 업데이트 25.04.2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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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건설공사현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나재필

"나는 불효자다." 훗날 분명히 땅을 치며 후회할 게 자명하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불효하고 있다. 갖은 변명과 핑계를 갖다 붙여보지만 면죄부를 받을 근거가 없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뒤늦게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숨 쉴 겨를 빼곤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지나가고 있다.

새벽 5시 기상 이후 밤늦게까지 노동 현장에서 일당을 벌고 집에 오면 쭉 뻗는다. 기력이 없을 만큼 녹초가 된 상태에서 저녁이 있는 삶은 없다. 그나마 위로해 주는 건 소주와 담배, 커피뿐이다. 모두가 타인의 인생처럼 쓴맛만 나는 것들이니 애달프다.


홀로 남겨진 어머님은 지척에 사신다. 자동차로 20분 거리. 조석으로 안부를 물어도 될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2주에 한 번꼴밖에 찾아뵙지 못한다. 그보다도 더 심각한 건 전화조차도 거의 안 한다는 사실이다. 건강을 묻고 일상을 답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반복된 질의응답이 싫어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핑곗거리를 찾고, 그 핑계에 덕지덕지 도망갈 궁리만 갖다 붙이니 대면할 일이 적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머님 얼굴을 떠올리고 안녕을 염려하건만 그저 마음뿐이다.

아버님을 떠나보낸 지 벌써 1년 반이 돼간다. 평생을 노동자로 사시다가 가신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회한과 반성이 동반된다. 아버지의 노동은 아버지 스스로 끝내지 못했고, 돌아가시고 나서야 노동을 끝내셨다. 그리고 유업을 이어받듯 나의 노동은 쉰 살이 넘어 시작됐다.

땀에 절어 쉰내 나던 그분의 체취, 일 년에 한두 번 빼고는 흙먼지 가득했던 작업복, 삶의 즐거움이라곤 어느 구석에도 보이지 않던 지친 기색, 고기 살 돈이 아까워 정육점 비계를 끊어오시던 가난함, 살 붙을 겨를이 없어 뼈마디가 푸르게 솟았던 가여운 몸, 푼돈 모으기도 바빠 평생 용돈 한번 안 주신 초라한 주머니, 몸이 아파 절룩거리면서도 새벽 일터로 나가던 비루먹을 시간들···.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원망도 아직 남아있다. 당신은 옛날 사람 정서대로 철저하게, 사무치게 장남주의자였다. 차남인 나와 누이에 대한 각별한 정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살면서 칭찬 한번 받은 일 없고 용돈조차 받아본 일이 없다. 나를 향해 따뜻한 웃음을 지어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어렸을 때부터 학창 시절까지 노동력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자식일 뿐이었다.

나의 노동을 못마땅해하시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다. 엄했던 기억, 다정하지 않았던 기억, 초라했던 기억밖엔 없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더 각별하고 애틋하다. 언제나 자식 편에서 서서, 덜 일하고 더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차의 핑계를 대도 어머님에 대한 불효를 감쇄시키진 못한다. 일주일에 하루를 빼고는 현장에 있다 보니 하루라도 온전히 쉬고 싶어 어머니를 찾지 않는다. 이기적인 자식이다. 아직도 어머니는 찻길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반찬 하나라도 입에 넣어주려고 애쓰신다.

그런 당신은 절뚝이며 찻길을 건너고, 입맛을 잃으셔 곡기를 거부하신다. 고깃집에서 뵙든, 백반집에서 뵙든 세 숟가락이면 끝이다. 지근거리에 사는 누님이 산해진미를 냉장고에 쟁여놔도 줄어드는 기미가 없다. 가끔 곰팡이 핀 음식물을 폐기하는 것이 반복되는 괴로움이다.

93세에 소천하신 장모님이 오버랩 된다. 장모는 밥을 잘 드시는 분이셨지만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1년여 전부터 음식을 꺼렸다. 왜 안 드시지 하는 생각만 되풀이했을 뿐 저변의 노화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러나 밥은 그냥 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숟가락을 놓는 순간 이승의 끈도 놓는다는 사실은 단순한 상식이었다. 그런 안타까움이 요즘 심란한 머릿속의 중심에 있다.

2주에 한 번 어머님을 뵐 때는 무조건 식당을 잡는다. 한식, 중식, 양식을 섞어가며 되도록 맛 나는 걸 찾아가는데 결국은 우리만 잘 먹는다. 이 아이러니한 식사 자리는 늘 불편하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입맛을 잃곤 한다. 함께 잘 먹어야 먹는 맛도 나지만 어머니가 드시지 않으니 그냥 끼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자리라도 만드니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머니는 나의 노동을 못마땅해하신다. 나이를 더 먹으면 골병이 나 병원 갈 일만 생긴다며 한사코 말리신다. 평생을 노동자의 아내로 살아온 당신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육체적 소진에 최적화되고 있다. 아프면 알약 하나 삼키고, 쑤시면 파스 한 장 붙이며 산다. 허구한 날 방구들 이불 삼아 뒹굴고 있는 것보다 백배 낫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골병이다. 마음의 병은 육체에서 오고, 육체의 무거움은 생각의 가벼움에서 온다. 마음을 달리 먹으면 인생의 방향은 항상 긍정 신호를 보내게 돼 있다.

몸이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인 나의 막노동

공사장 개인보호구 보관소에 안전모가 걸려있다.나재필

나는 전기업체에서 일한다. 항상 전기를 만지다 보니 방심하면 통닭구이가 될 수도 있다. 전기의 '전'자도 모르던, 그래서 집의 형광등조차도 갈지 못했던 과거에 비하면 천지개벽할 변화다. 주로 하는 일은 케이블을 포설하고 가설분전반을 관리하는 것이다. 현장은 언제나 터프하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도 몇 번씩 노동을 끝낼까 망설이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의 이유가 있듯, 가끔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찾기도 한다.

최근 일이다. 우리 팀에 말쑥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팀원이 들어왔다. 서울에서만 쭉 살아왔고 이쪽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수출입 기업 대상으로 통관 대행을 10년 넘게 해온 영업팀장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몸 쓰는 일은 안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계기가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쓴 <나의 막노동 일지>를 읽고 사무직 인생을 벗어나 노동일에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 더구나 1만여 명이 다니는 매머드급 현장에서 내가 속한 업체에 오게 된 것, 그것도 팀까지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닌 기적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인연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나의 막노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만, 그가 앞으로 노동판에서 느낄 통증과 지루한 육체적 마모를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은 된다. 누군가의 미래를 올바로 이끈 것인지, 아니면 애먼 사람을 고통의 나락으로 이끈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나의 막노동을 몸이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세상에 어디 불만 없는 직업, 직장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모두가 불평등하게 일하고 있는 것이 평등이다. 좋든 싫든 일터는 삶터다. 그에게 일단 부딪쳐보라고 했다. 인생에 연습이 없듯 노동은 실전이니까. 버티다가 보면 버틸 힘이 생기니까. 그리고 무너지고 깨지면서 근력이 생기니까 싸워보라고 했다. 그가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자들에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같은 날이다. 유급휴일이므로 근로를 제공하지 않아도 돈 받는 휴일을 보장받는다. 노동자들이 이날만큼은 맛있는 음식 먹고 멋있는 하루를 즐겼으면 좋겠다. 내가 불효하니 효도를 권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수고로 인해 가정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게 효도라고 생각한다.

"노동자여,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의 막노동 일지 - 계속 일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나재필 (지은이), 아를(2023)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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