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만화를 보러갔다> 본문 중에서(박성환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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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책에 소환된 여덟 명랑만화가는 다음과 같다. <꺼벙이>의 길창덕, <맹꽁이서당>의 윤승운, <로봇 찌빠>의 신문수, <고인돌>의 박수동, <심술통>의 이정문, <우야꼬>의 윤준환,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멍텅구리 특공대>의 손상헌. 명랑만화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가들의 삶을 칸마다 구성했다. 만화가의 삶을 만화로 다뤄 더욱 감칠맛 난다.
묘하게 페이지를 아껴 읽게 된다. "우리는 모두 명랑만화를 보며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의 귀여운 기억 한 페이지를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서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독자 역시 추억의 한 장을 펼치게 된다. 당시 어린이잡지의 양대산맥이라 불렸던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에 만화를 연재했던 작가들의 에피소드 또한 박진감 넘친다.
그들의 작품을 앞다퉈 실었던 잡지사 사람들, 사제지간 무용담, 만화가들이 친목을 다졌던 모임 '심수회' 등 어깨너머로 만화가 화실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시절 만화로 먹고산 사람들 이야기가 추억이란 멍에를 벗고 생생하게 재현된다.
천진하고 정 많은 만화 캐릭터들
솔직히 말하면,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저자가 소개한 작가 모두를 알지는 못한다. 명랑만화 쇠퇴기 무렵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와 삼촌이 펼치던 만화책, 책받침, 어른들이 쌓아놓은 정기간행물에 실린 명랑만화를 본 기억이 어슴푸레 존재한다.
저자는 그 희미한 기억에 색을 입힌다.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명랑만화 캐릭터들의 계보를 알려줘 국내 만화사를 보는 눈을 키운다. 그래서 이 책은 국내 만화의 역사를 알고 싶거나 만화가를 꿈꾸는 어린이, 청소년과 함께 봐도 좋겠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세대에게, 우리 만화가 웹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소개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저자가 명랑만화 계보를 논하며 첫 소개한 만화가는 길창덕. 1955년 <서울신문>으로 데뷔했고 잡지 <아리랑>에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재하면서 인기 만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단행본으로 만화를 내야 돈이 된다는 주변 작가의 말에 단행본 사업에도 뛰어들지만, 당시 많은 양의 만화를 급하게 제작해 유통하는 출판 시스템이 만화가의 발목을 잡는다.
길창덕은 다시 신문과 잡지 연재에 집중한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가 우리가 잘 아는 재동이 그리고 반쯤 잠긴 눈의 '꺼벙이'. 특히 꺼벙이는 그동안 뭐든지 잘하고, 심지어 똑똑하고, 화려한 모습을 지닌 만화 캐릭터들과 차별화되며 대중 사이에서 급부상한다.
독자들은 사고뭉치 꺼벙이에게 공감했다. "약간 부족하지만 순수하고 정이 많은 꺼벙이"의 성격을 닮은 친구가 교실마다 꼭 한 명씩 있었다. 독자 사랑에 힘입어 길창덕은 '신판 보물섬'을 비롯해 '선달이 여행기' '코미디 홍길동' 등 학습만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굵직한 작품들을 남겼다.

▲<명랑만화를 보러갔다>(박성환 지음) 첫 번째 이야기: 길창덕 만화가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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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편으로 시사만화를 그리며 번번이 검열의 벽에 부딪혔던 길창덕의 고뇌를 담아냈다. 당시 검열이 팽배했던 사회에서 자신의 만화가 삭제됐거나 잘린 채 신문사, 잡지사에 실렸던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만났을 아찔한 모습이다.
길창덕은 검열의 좌절을 겪을 때마다 "이왕 칸을 메우려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염원으로 명랑만화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렇게 명작들은 비운의 시대 가운데 탄생했지만 1990년대엔 어두운 국면을 만난다. 일본 만화 수입으로 쇠퇴한 명랑만화의 운명을 만나는 일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편지 보내며 교류... 한국 만화의 지형을 넓힌 '둘리아빠' 김수정
두 번째로 소개한 명랑만화가는 윤승운. 1963년 대중잡지 <아리랑>에 '자선영감'을 연재하면서 정식 데뷔했다. 습작하던 19세 시절, 그가 길창덕 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일화가 흥미롭다. 실제로 책 군데군데 명랑만화를 대표하는 만화가들이 스승과 인연을 맺은 경로나 문하생이 된 과정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엔 '손편지'가 SNS 역할이었던 셈.
윤승운은 1975년, '요철발명왕'으로 대표작을 세운다. 엉터리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어린이와 매번 그 발명품으로 인해 골탕을 먹는 어른이 등장하는 서사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짜릿한 해소감을 안겼다. 촉박한 마감기한에 시달리며 매달 수십쪽 별책부록의 만화를 그렸던 작가들의 애환도 생생한데, 그들이 분투한 만큼 명랑만화가 다양한 단행본으로 명맥을 잇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맹꽁이 서당'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윤승운은 조선 시대, 말썽만 일으키는 학동들과 훈장님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로 명성을 넓혔다. 역사 만화에 애착이 컸는데,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학을 가르치는 성균관 한림원에 들어가 5년간 공부했다. 이를 통해 만든 '겨레의 인걸 100인'으로 대하소설 <상도>를 쓴 최인호 소설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명랑만화를 보러갔다>(박성환 지음) 두 번째 이야기: 윤승운 만화가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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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끄트머리, 지금의 청소년들도 알 법한 '둘리 아빠' 김수정 만화가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된다. 김수정이 청년 시절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돌며 거절을 여럿 당했다는 사실,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가 공모전에 입선해 데뷔했다는 것보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가 '아기공룡 둘리' 말고도 다양한 청춘·성인만화를 그렸다는 것.
김수정은 시대가 바라는 얌전한 여고생에서 탈피해 실제 여고생의 일상을 'O달자의 봄'에 유쾌하게 담아냈다. 직장에서 만년 평사원으로 살던 '날자! 고도리'로 당시 사회 또한 매콤하게 풍자했다. 그러다 1983년, 만화잡지 <보물섬>이 창간돼 명랑만화 연재를 시작했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둘리와 친구들, 어른 고길동 간의 대립이 맛깔나는 '아기공룡 둘리'의 첫 시작이었다.
이 책엔 '아기공룡 둘리'를 둘러싼 영광의 날만 있지 않다. 척박한 국내 만화 현실로 인해 더 진일보하고자 했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던 만화가의 좌절이 스며 있다. 국내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산업 시스템의 빈곤을 느꼈던 김수정은 1995년 주식회사 둘리나라를 세웠고, 1996년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개봉한다. 모든 작업을 직접 모니터링한 결과다. 그는 청탁을 통해 만화를 그리고 지면을 할당받는 만화가의 입지를 넓혀 갔다.
▲<명랑만화를 보러갔다>(박성환 지음) 일곱 번째 이야기: 김수정 만화가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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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은 한국 만화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아기공룡 둘리>의 가장 큰 미덕은 이 사회에서 하위문화였던 만화의 지위를 당당히 영상산업의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내 인생의 만화책, 황민호>)"는 점은 만화를 소비하는 독자도, 만드는 편집자도 한 번쯤 기억하면 좋을 대목일 것이다. 더불어 그런 김수정에게 자양분이 돼줬던 한국 명랑만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이 책으로 만나 웹툰 이전의 만화사를 조우해 보길 권해 본다.
둘리의 생일은 4월 22일, 올해로 만 42살이다. 최근 <아기공룡 둘리 1~5> 애장판이 복간돼 겹경사가 겹쳤는데, 앞으로 더 많은 명랑만화가 복간되었으면 좋겠다. 도깨비감투, 고인돌, 심술통 등 곁에 두고 오래 보고 싶은 만화는 넘치는데 출판계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 복간될 여지는 늘 적은 것 같다.
그럼에도 기다려본다. 추억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현실이 될 때 명랑만화가 한 장르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역사의 뒤안길에 가두기엔 만화가들이 아이처럼 아끼며 그렸던 명랑만화 캐릭터들이 옛 그 시절과 다정하게 닮아 있으니까. 그 다정이 마음속에서 살아나, 손에 잡히는 이야기로 나오길 바라는 독자가 분명 존재하니까.
명랑만화를 보러갔다
박성환 (지은이), 팬덤북스(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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