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4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충무공 문제로 십사명 강제 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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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국 역사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이순신처럼 막아낸 명장은 없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300년간 일본은 잠잠했다. 일본이 조선·오키나와와 청나라령 대만을 향해 군사행동을 본격화한 것은 1870년대다. 이순신은 일본의 대륙 정복 야망을 300년간 잠재웠다.
1928년 봄에 대구고등보통학교(중등)의 일본인 교사는 이순신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두 눈으로 실감했다. 신학기가 시작하는 달에 발행된 그해 4월 3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일본인 교유(敎諭)는 학생들 앞에서 이순신의 이름을 잘못 거론했다가 항의를 받았다.
이 기사는 "일본인 모 교유가 일본 력사를 가르킬 때에 지난 임진란 때에 긔 공을 세워 영명을 만고에 전하는 충무공 리순신 씨를 적이라고 말함"으로써 학생들을 자극했다고 전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이순신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듯하다. '그 기(其)'를 써서 "긔(其) 공"으로 처리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긔 공"을 세워 이 땅을 구한 이순신을 적으로 지칭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학생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리순신 씨는 조선에 유명한 충신이란 말을 들엇는데 적이라 함은 이상하다"는 말들을 했다고 위 신문은 보도했다.
학교 측은 학생 14명을 강제전학시켰다. 위 기사는 "사실상 퇴학 처분"이라고 평했다.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관공립 학교에는 전학할 수가 업스나 사립학교에는 전학을 할 수 잇스니, 우리 학교에는 다시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으면 가되, 행여라도 우리 학교로 다시 오지는 말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신문은 "긔괴한 처분"이라고 평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볼 때도, 너무 가혹하고 기괴한 징계였던 것이다. 이순신 팬들의 태도가 일제 지배자들을 얼마나 화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충성회의 정신적 구심점 이순신
이순신에 대한 애정은 오사카 비밀결사인 충성회의 조직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영수·김선홍·이대교·이지로·남상순·허만준과 이 지정을 받지 못한 동방옥모(東方沃模) 등이 참여한 충성회에서는 이순신이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권: 학생운동사자료집>을 보면, 동방옥모는 경남 사천군 출신이다. 한국 태생인데도 일본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본명이 밝혀지지 않고 창씨명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 문서에 근거한 이 자료집은 그가 1942년 12월 16일 체포됐으며 문서가 생산된 시점에 20세였다고 알려준다.
검거 당시 신문 배달원이었던 동방옥모는 충성회 주창자이자 고학생인 전영수를 만나기 전부터 '선명하고 예리한' 민족주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위 자료집은 "동방옥모·남상순 등은 이미 의식이 선예했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이에 공명하였다"고 말한다.
보훈부가 일본 내무성 경보국, 사법성 형사국,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의 보고서를 묶은 <재일본 조선인 운동자료>를 발췌해 만든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3권: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에 의하면, 충성회가 1941년 6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30회 이상의 집회를 통해 도출한 투쟁 방침 중 하나는 이렇다.
"정한론을 주창하였던 서향융성(西鄕隆盛) 같은 부류를 저주·말살시키고, 안중근 같은 선열을 비롯하여 이순신·왕인 등과 같은 선각자를 현창할 것."
부산 맞은편인 규슈섬 서남부가 한국정복론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의 본거지다. 이곳 사쓰마번 출신인 그는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를 무너트리고 왕정복고를 이룬 메이지유신(1868)의 주역이다.
1598년에 이순신에게 쫓겨간 일본군은 1875년에 강화도 포격을 벌여 300년의 평화를 깨트렸다. 조선인들은 운요호사건으로 불리는 이 도발이 사이고 다카모리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그런 조선인들의 정서를 "근년에는 일본의 태도가 변하여 서쪽으로부터 나타나서 새매나 독수리처럼 노려보고 있으니, 더욱 그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라며 "강화(江華)의 전쟁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계를 벌려놓으려는 데에 뜻이 있었는데"라는 말로 소개했다. 일본 군함이 갑자기 서쪽 바다에 출현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은 양국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의중을 반영한다는 인식이 조선 내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정한론이 투영된 운요호사건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 결과물이 35년 뒤의 한국 강점이다. 동방옥모와 전영수 등이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인물을 저주하고 말살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룬 것은 그 때문이다.
일본에 맞선 이순신·안중근 선전이 필요하다
동방옥모 등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후예들로부터 한국을 구하려면 안중근·왕인과 더불어 이순신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파한 한류 주역인 왕인 등과 더불어, 무력을 사용해 일본에 맞선 이순신·안중근을 선전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위 별집에 나타난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충성회는 한국 교민들을 상대로 항일 선전전을 펼치고, 미군 전투기가 일본을 공습할 때를 겨냥해 항일 투쟁을 도모했다. "미국 비행기의 일본 내습은 그때마다 독립운동 달성이 접근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동조하여 운동 기초를 굳히게 할 것"이라는 내부 방침이 있었다고 일본 경찰은 파악했다.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독립이 임박한 증거로 이해하고, 공습 직후의 혼란을 활용해 투쟁에 나선다는 방침을 정했다.
충성회는 꽤 정확한 정세 예측하에 움직였다. 별집은 전영수의 운동 계획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1941~2년은 오로지 자기 완성과 동지 획득에 노력하고 1943년도에는 이를 조직화하여 단결을 굳히고 1944년도에는 반드시 미·영의 반격에 의하여 일본의 패망은 필연적이라고 망단"했다고 말한다. 망령된 판단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별집이 일본 측 자료를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6권에 따르면, 전영수는 한국 국가보안법의 원형이 된 일본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3·1운동 민족대표 대부분이 1년 6개월에서 3년 형을 받은 점, 학생 비밀결사에 참여한 윤동주가 1944년에 징역 2년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전영수의 형량은 높은 편이었다. 이지로는 징역 2년 6개월, 남상순은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았다. 충성회가 꽤 위협적이었음을 보여주는 형량이다.
그런데 동방옥모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전부터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고 전영모의 핵심 동지였는데도, 일본 검찰은 그를 석방했다. 허만준과 조경복 등도 기소유예를 받았다.
이순신 탄신일은 양력으로 4월 28일이다. 일제 때 사람들은 이 날짜를 알고 있었다. 일례로, 1932년 5월 26일 자 <조선일보>에는 "음력 3월 8일 충무공의 생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1926년에 즉위해 1945년에 패망을 당한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집권기에는 4월 29일이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이었다. 윤봉길이 1932년 4월 29일에 천장절 기념식장인 상하이 홍커우공원에 갖고 들어간 폭탄은 생일 선물이었다.
이순신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구심점이었다. 그런 이순신의 탄신일이 히로히토 생일의 전날이었다. 그래서 히로히토 즉위 이후의 일제는 이순신을 더욱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순신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면, 4월 29일이 아니라 4월 28일이 부각될 수도 있었다. 대구교보에서 "긔괴한" 학사 징계가 나온 시점이 히로히토 즉위 이후인 1928년 4월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동방옥모와 전영수 등은 이순신을 가슴에 품고 오사카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오사카 현지에서 반일 여론을 확산시키고 한국인들을 조직화했다. 이런 한국인들의 존재로 인해 일본은 국외뿐 아니라 국내로도 에너지를 많이 분산시켜야 했다. 스스로 돈을 벌고 공부를 해가며 오사카에서 일본의 전쟁 역량을 분산시켰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항일운동은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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