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
열린국회정보 정보공개포털
그래서 4·19의 결과로 탄생한 신정부는 자유당 정권보다 훨씬 덜 폭력적이지만 한층 더 친일적이었다. 이는 현석호(玄錫虎) 같은 친일파가 장면 정권의 초대 내각에 입각하는 원인이 됐다.
이승만은 친일파 주류 세력인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결별한 뒤 지방의 친일 자본가들을 주축으로 자유당을 건설했다. 1948년 정부수립을 즈음해 그와 결별한 친일파 주류 세력은 한민당과 민주국민당을 거쳐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래서 인적 구성으로만 보면 민주당이 이승만정권보다 친일 색채를 더 많이 풍겼다.
이승만의 3선이 걸린 1956년 대선을 이틀 앞둔 그해 5월 13일,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이끄는 대한부인회가 <동아일보> 3면 의견광고를 통해 이승만 지지를 당부하면서 민주당을 "친일파·민족반역자·지주·자본가의 집단 소굴"로 폄하했다.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이승만 정권의 관변단체가 이런 비난을 당당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친일파의 주류 세력이 민주당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친일세력이 4·19혁명의 결과물인 제2공화국을 점거했다. 국방장관 현석호 외에도 총리 장면, 재무장관 김영선, 법무장관 조재천, 부흥장관 주요한, 상공장관 이태용, 무임소장관 김선태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윤보선 대통령과 내각 구성원을 합한 16명 중에서 총리를 포함한 7명이 이 사전에 등재될 정도의 주요 친일파였으니, 친일 내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재무·법무·국방의 요직을 친일파들이 차지한 사실만으로도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4월혁명에 힘입어 국방을 맡게 된 현석호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한 다음 날인 1907년 5월 23일 경북 예천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현성팔(聖八)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현석호 편은 "1930년대 중반 현석호로 개명했다"고 알려준다. 안동 창동의숙, 예천 대창학원, 대구농림학교를 거쳐 1929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가고 1934년에 법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전년도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그는 1934년에 전남 내무부 지방과에 배치되고, 이듬해에는 전남 경찰부 경무과 경부를 겸임했다. 29세 때인 1936년에는 전남 화순군수가 되고 다음 해에는 황해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승진했다.
일제가 국민징용령을 제정하고(7.1) 미국이 미일통상항해조약 파기를 통고해(7.27) 미일관계가 험악해진 1939년 7월은 그의 관료 인생의 변곡점이다. 일본 정부에 직속돼 해외 일본인들을 통합하는 책무가 그에게 주어진다. <친일인명사전>은 "흥아원(興亞院) 사무관 겸 조선총독부 총독관방 외무부 사무관으로 베이징의 흥아원 화베이연락부에서 근무했다"라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흥아원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지원하기 위해 대중국 정치·경제·문화에 관한 행정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일본 총리대신을 총재로 하여 육해군성을 비롯한 각 성에서 파견된 관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베이징·상하이 등지에 연락부를 두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뿐 아니라 중국 침략까지 거들게 된 현석호는 1941년 11월에는 베이징 인근의 흥아원 톈진출장소로 옮겨갔다. 뒤이어 일본 외교관이 됐다. "1942년 11월 흥아원이 일본 외무성에 합병되면서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의 3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베이징·톈진·지난·칭다오 등지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상대로 정신교육을 담당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기술한다. 일제의 중국 침략을 지원하고 재중국 일본인들의 편의를 돕는 차원을 뛰어넘어 현지 일본인들의 정신교육까지 담당했다. 일본 정부가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현석호는 1934년부터 11년간 친일 봉급을 받으며, 일반적인 친일 관료와는 차원이 다른 업무를 수행했다. 이런 인물이 미군정하의 민정이양 준비기구인 남조선과도정부의 중앙경제위원회 기획관과 자유당 국회의원(1954년 제3대)을 거쳐 1955년부터 민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4·19혁명에 힘입어 국방장관이 됐다.
죄책감 느낀다며 사과는 했지만...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현석호는 국방장관으로서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
위키미디어 공용
<친일인명사전>에 의하면, 1944년에 귀국해 충남 광공부장으로 부역하던 그는 미군이 상륙한 1945년 9월에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 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한 뒤 사퇴했다.
그는 1984년 1월부터 12월까지 <경향잡지>에 연재한 '한 삶의 고백'에서도 "나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없었으나, 일정 때 고급 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도의적 죄책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양심상으로는 부끄럽지 않고 도의적으로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다소 알쏭달쏭한 사과다. 이 정도 사과도 하지 않은 친일파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세상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 정권뿐 아니라 그 개인 역시 식민지배 청산과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문제에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사과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장면 정권의 초대 내각과 관련해 "일제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자가 전체의 31.2%(행정과 3명, 사법과 2명)가 되고 이들은 일제시 고등관을 지냈다", "장면 정권의 초대 내각은 대부분 일제시 대지주 자손이거나 고위 관료의 출신"이라고 한 뒤 "민주당 정권은 친일적·친미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을 학살하며 패악질을 벌인 근본 원인은 이들이 국민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친일분단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 역시 분단 세력이자 친일 세력이었다. 친일 성향만큼은 자유당에 뒤질 게 없었다. 현석호를 비롯한 이런 세력이 4·19혁명의 수혜자가 되어 국가 경영을 담당한 것은 역사 발전을 지체시키는 원인이었다.
현석호는 1960년 8월 23일부터 9월 12일까지, 1961년 1월 30일부터 5월 18일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국군이 1961년 5·16 쿠데타를 막지 못한 데는 그의 책임도 크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벌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도 이를 막지 못했다. 외침을 막는 것도 국방이고 내란을 막는 것도 국방이다. 이 임무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다.
현석호는 5·16 쿠데타 직후에 반국가행위 혐의로 체포됐다가 그해 10월에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67년에는 민주당 고문이 됐고, 1967년부터 1988년까지는 가톨릭교리연구소장과 가톨릭교리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경향잡지>에 참회의 글을 올린 지 4년 뒤인 1988년 12월 2일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