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 선언을 주도한 도쿄 유학생들
연합뉴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는 천도교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고종의 사망으로 조성된 국내외 정세를 관찰하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중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때에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거사 계획이 1월 중순경 귀국한 송계백에 의하여 정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선배인 현상윤을 찾아가 일본 유학생의 독립선언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고, 모자 속에 감추어온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 날짜를 2월 상순으로 정했음을 알렸다. 현상윤은 최린에게 선언문을 보냈으며, 이것은 동경 유학생의 거사 계획과 함께 의암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의암은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계획의 적극 추진을 명하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추진 중인 민족거사 계획을 3월 초에는 실현할 수 있도록 다짐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의 선구적 모습은 2·8독립선언서에서도 확인된다. 선언서 내의 결의문 제4항은 "전항(前項)의 요구가 실패할 시는 오족(吾族)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을 선(宣)함"이라며 "차(此)로써 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그 책(責)에 임(任)치 아니함"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이 독립을 방해하면 영원한 혈전을 벌이겠다며 이로써 생기는 피해는 우리가 책임지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는 선전포고였다. 3·1독립선언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2·8독립선언서에 동의한 약 600명은 대담했다. 서너 명도 아닌 그 정도의 인원이 한국도 아닌 일본 수도에서 혈전을 선포하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025년 이 시국에 백악관 앞에 가서 '인권을 보호하지 않으면 영원의 혈전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는 것 이상의 용기와 신념이 필요했다.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는 "일제 통치권력의 심장부"라는 표현을 써가며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와 싸우는 격"이었다고 이 사건을 높이 평한다. 일본이 호랑이 같은 국가는 아니므로 '늑대 굴'이라고 바꿔야 이 사건의 역사적 의의가 명확해진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늑대 굴에 들어가 싸운 것은 아니다. 늑대 굴에서 잠시 빠져나와 늑대를 성토한 것도 아니다. 그 전부터 늑대 굴에 있다가 그 속에 계속 머물면서 늑대를 면전에 두고 꾸짖은 일이다. 이 용감한 학생들 중에서 최팔용·서춘·송계백 등은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하지만 최근우 등은 핵심 인물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최근우는 해방 직후에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및 근로인민당에 참여했고, 4·19혁명의 해인 1960년에는 혁신계인 사회당을 결성했다. 이 때문에 5·16 쿠데타 뒤에 용공세력으로 몰려 체포됐다.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을 대변했던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이 집중 공격한 인물 중 하나가 여운형이다. 바로 그 여운형(1886~1947)의 핵심 측근이 최근우다. 중도세력도 빨갱이로 매도하는 반공세력이 잔존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최근우의 이력은 독립유공자 지정에 불리하다.
여운형보다 열한 살 어린 최근우는 2·8독립선언 당시 22세였다. <사학연구> 제140호(2020년)에 실린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본 최근우의 활동과 정치사상'은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라며 "16세에 단신 도일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준다. 1913년이나 1914년 무렵에 일본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국립 히토쓰바시대학의 전신인 도쿄고등상업학교에 들어간 최근우는 늑대 굴 안에서 반(反)늑대 활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됐다. 위 논문은 "일제에 위험한 인물을 갑호와 을호로 나누어 감시하고 있었는데, 최근우는 당초에는 요시찰 을호로 분류되어 감시"됐다고 말한다.
그는 2·8독립선언 직전에는 학생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확산하는 일에 참여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4개월 전인 1918년 10월 5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웅변대회 때 그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이렇게 촉구했다.
"토지도 가옥도 타인에게 빼앗겨 거의 한 조각의 땅, 한 칸의 가옥도 지키지 못하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게 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다른 사회는 매년 그 부를 증가시키고 병력을 키우고 판도를 확장하고자 모든 수단·방법을 강구하여 혹은 국민을 희생하고 국가의 재산을 소비하고 전쟁을 일삼고 있는 오늘날, 자신의 것을 빼앗겨도 만족하고 있는 사회가 어디 있는가?"
적지에서 도발을 일으킨 최근우와 동지들은 독립선언 발표를 목표로 대담한 행동을 이어 나갔다. 12월 29일과 1월 6일에도 웅변대회를 열어 세를 확장해 나간 그들은 7일에는 최근우와 최팔용·서춘·송계백 등 11인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했다. 최근우는 10월 5일에 이어 이날도 경시청에 소환돼 주의를 받았다.
윤소영 논문에 인용된 일본 측 자료를 보면, 최근우는 1919년 1월 6일 이후에 송계백 등과 함께 늑대굴에서 나와 한국에서 모종의 활동을 하다가 도쿄로 돌아갔다. 그런 뒤 2월 8일 오후 1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약 600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 선포식에 참여했다. 위 논문에 인용된 <지지신보> 보도에 따르면, 일제는 경시청 병력 10여 명과 경찰서 병력 30여 명을 투입했고, 이로 인한 격투 과정에서 최근우를 비롯한 양측 부상자가 20명 정도 나왔다.
그날 최근우 등은 체포됐다. 그런데 최근우는 당일에 풀려나 그날 상하이로 탈출했다. 3월 상순경에 일제는 '최근우가 한국으로 나가 독립운동을 했을 뿐 아니라, 시베리아까지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다'고 경찰 문서를 통해 정리했다. 일제는 그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을호 요시찰 인물'에서 '갑호 요시찰인물'로 격상했다. 경시청이 그를 번번이 소환하거나 체포하면서도 인물의 그릇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주국 이사관'의 반전... 알고 보니 여운형의 정보원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두 달 전 모습이다.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상하이로 간 최근우는 그해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독립신문> 기자가 됐다. 그런 뒤 하라 다카시 내각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의 수행원이 되어 도쿄를 방문했다.
여운형은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전격적 행동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일본은 그를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3·1운동 민심을 달래보고자 했다. 이때 최근우는 여운형을 밀착 취재한 결과를 '여운형씨 일행 도일기'라는 제목으로 <독립신문>에 연재했다.
최근우는 1920년 5월부터 7년간 여운형의 권유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국내에서 잠시 청년운동을 하다가 1930년부터 1944년 무렵까지 만주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의 정보원이었던 그는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이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이 때문에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사 4476명에 포함됐지만, 여운형과의 관계가 밝혀져 2009년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최근우는 4·19혁명 시기의 진보정치 활동으로 인해 5·16 쿠데타 한 달 뒤인 1961년 6월 15일 체포됐다. 최근우 등에 대한 '혁명재판'의 첫 공판은 8월 29일에 열렸다. 이날 피고인 중 하나인 사회당 당무위원장 문희중이 재판장에게 던진 질문이 있다. "최근우 위원장이 왜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법정 사진과 함께 발행된 그날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재판장이 아닌 검사에게서 나왔다. 검찰은 "지난 8월 3일 하오 10시 15분경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형무소 병감에서 사망하였다"고 답변했다. 2·8 독립선언 주역이자 학생 행동주의자인 최근우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다가 옥중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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