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19 14:41최종 업데이트 25.04.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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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 정상과 수행원들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연합뉴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지 80년이 되었으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일제 잔재가 가득하다. 일제 잔재는 말과 글 속에도, 제도와 관습 속에도 많이 남아 있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여전히 큰소리치며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그늘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일제 잔재 중 가장 큰 것은 분단이다. 식민 지배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남과 북의 주체적 움직임이 아주 강했던 시절, 통일은 아니어도 남북 교류는 곧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밀려오던 때다. 바로 25년 전, 2000년이다. 우리는 그렇게 새천년을 맞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지 2년여, 경제적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1년 전에 있었던 제1차 연평해전 탓에 대북 경계심은 여전했다. 그러던 2000년 4월 10일,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 남북정상회담 개최 계획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후 남과 북은 55년 분단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평화를 위해 경쟁과 대결 태도를 버리고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보여줬다. 그런 봄이 있었고, 그런 희망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타협과 양보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두 번의 진보정권 하에서 남북 간 대화와 협력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다. 세 번의 보수정권 하에서는 대화 자체가 사라졌다. 급기야 2023년 12월 북은 공개적으로 통일을 포기하고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의미하는 '2국가론'을 선언하였다. 남은 당연하다는 듯 별 반응도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2024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여론조사에서는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이 35.0%로 이 조사 실시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다. 20대에서는 47.4%가 통일이 필요 없다고 응답하였다. 일본은 섬나라 신세를 벗어나고자 한반도 침략을 반복해 왔는데, 우리는 분단으로 만들어진 섬나라 신세를 벗어날 의지를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는 지난 4반세기 동안 과연 무엇을 한 것인지?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25년 전 우리 모습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5년 전 오늘도 그랬듯 벚꽃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당시 벌어졌던 주요 사건 제목만 읽는데도 가슴이 뛴다.

4월 10일 통일부, 남북정상회담을 6월 12~14일 평양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5월 26일 북의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였다.
6월 4일 평양 교예단이 잠실체육관에서 공연하였다.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평양 순안공항 도착,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났다.
6월 13일 평양에서 김대중-김정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6월 13일 전국 10개 대학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동시에 게양되었다.
6월 15일 김대중-김정일 남북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6월 16일 남과 북, DMZ 상호 체제 비판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였다.
6월 27일 금강산에서 이산가족상봉 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개최하였다.
7월 22일 북의 SF영화 <불가사리> 남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7월 28일 남북통일탁구대회 남과 북에서 동시에 생중계하였다.
7월 29일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8월 5일 국내 언론사 대표단 56명 평양을 방문하였다.
8월 8일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 소 500마리 끌고 북을 방문하였다.
8월 11일 통일부, '서울-평양 간 광통신망 구축 완료'를 발표하였다.
8월 14일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업무를 재개하였다.
8월 15일 서울 코엑스, 평양 고려호텔에서 대규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루어졌다.
8월 21일 북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이 예술의전당에서 합동공연을 하였다.
8월 29일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9월 10일 KBS와 조선중앙텔레비존이 생방송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동시 방영하였다.
9월 15일 시드니올림픽에서 남북한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공동입장하였다.
9월 18일 임진각에서 경의선 철도와 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9월 25일 제주에서 남북국방장관 회담이 열렸다.
9월 28일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 경의선 복원과 임진강 수해방지기구 설치에 합의하였다.
10월 9일 SBS 8시 뉴스를 북한 현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하였다.
10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되었다.
11월 21일 현대아산과 북한, 서울-평양 직통전화를 개통하였다.
11월 28일 북측 판문각에서 제1차 남북군사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12월 27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경제협력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가장 좋은 아이스 브레이커

2009년 3월 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 응하며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미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남소연

남북 대화에서도 커피는 종종 공적 음료로 등장한 바 있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도 북측 수행원들은 우리 측 담당자들에게 종종 커피를 요청해 함께 마심으로써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남과 북이 교환한 공식 선물에 커피세트가 포함되었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시민저널리즘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가 창간된 2000년 한 해 동안 한반도는 통일 열기로 가득했다. 자고 나면 통일로 가는 길이 한 뼘씩 열렸고, 전쟁의 불안은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갔다. 누구나 다가오는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떠나는 날 아침 김대중 대통령이 아침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북을 다녀온 언론인들 입을 통해 북에서는 커피가 매우 귀하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그해 여름 커피를 좋아하던 신상옥 감독이 북에서 만든 영화 <불가사리>가 큰 관심 속에 남에서 개봉되었다. 북녘 영화가 남쪽 극장에서 개봉되던 때였다.

남북정상회담 한 달 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참석했던 남과 북 외무장관 회담이 열렸다. 회담이 열린 호텔에서 마주친 태국 주재 북측 대사관 직원들은 남측 기자들에게 커피를 먼저 권하는 등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커피는 어색함을 풀어주는 신기한 음료였다.

남과 북이 평화로 가는 길을 모색하던 당시 북한 시장을 노리던 미국 기업들의 관심 물품이 곡물, 커피, 그리고 석유류 순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커피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을 상징하는 물품의 하나였고, 자본주의의 대표 소비품이었다.

그해 남북정상회담의 주역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타협과 양보의 가치를 잊은 우리 민족 탓이다. 분단의 비극, 통일의 가치를 잊고 지내는 우리 탓이다.

커피는 원래 개인적인 기호품, 즉 사적인 음료로 등장하기 이전에는 공적인 음료였다. 즉, 함께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맞는 음료가 커피였다. 혼자 즐기는 음료는 아니었다. 혁명가들이, 상인들이, 문인들이, 시민운동가들이 모여서 이성적인 논의를 할 때 함께 하는 음료가 커피였다.

지금도 커피는 가장 좋은 아이스 브레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낯선 만남의 자리에서 커피는 대화의 문을 여는 음료로 매우 적절하게 활용된다. 어떤 커피를 드실지를 묻는다든지, 커피 맛은 어떤지를 물음으로써 어색한 분위기를 녹일 수 있다. 커피가 얼어붙은 남과 북 관계를 녹여주는 아이스 브레이커 음료 기능을 발휘할 날이 찾아올 수 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한겨레> 2000년 커피 관련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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