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두긴
타스/연합뉴스
미국 외교의 좌표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그 변화가 러시아의 정치사상 언어와 공명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러시아의 극우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이다.
현대 러시아 극우주의의 핵심 인물인 그는 "문명 충돌"과 "다자주의 해체"를 통해 세계는 권역별 질서로 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서구 보편주의는 타락했고, 각 문명은 고유한 전통을 따라야 하며, '강한 국가'만이 살아남는다는 그의 철학은 푸틴 정부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놀라운 것은, 이런 세계관이 더 이상 크렘린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명 충돌"과 "다자주의의 붕괴"라는 언어는 이제 워싱턴에서도 낯설지 않다. 특히 미국 우파 일부는 이러한 사상을 통해 자신들이 느끼는 '자유주의의 피로', '전통 가치의 해체', '국가 정체성의 약화'에 대한 불안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도구를 얻었다.
자유, 다원주의, 인권 같은 가치보다는 질서, 통제,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이 새로운 질서관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와는 결이 다른, 문명 충돌을 전제로 한 권위주의적 다극주의에 가깝다.
이러한 사상적 좌표의 이동은 외교정책으로 구체화된다. 동맹은 신뢰가 아니라 조건이 되었고, 관세는 정책이 아니라 징벌이 되었으며, 파트너는 협력자가 아니라 잠재적 배신자로 간주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상의 변화와 전략의 붕괴가 두 흐름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둘은 하나의 철학적 전환에서 비롯된 연쇄 반응이며, 같은 시스템 안에 존재한다.
미국은 더 이상 자유주의 리더가 아니다. 문명 충돌을 전제로 한 권위주의적 질서관을 실현하고 있으며, 그 사상적 이동의 배경에는 러시아 극우 사상에 대한 무의식적 매혹이 깔려 있다.
그 결과는 동맹 파괴, 줄타기 국가들의 혼란, 그리고 중국의 전략적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단순히 중국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의 극우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이 말한, "세계는 문명권의 충돌이고, '약한 다자주의'는 사라질 운명"이라는 사고방식은 이제 모스크바의 전유물이 아니다. 워싱턴에서도 공공연히 들린다.
미국 우파가 받아들이는 이 세계관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아니라, 힘의 질서를 꿈꾼다. 문제는, 이제 그 질서의 수혜자가 미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자리를 지금 중국이 더 매끄럽고 전략적으로 채워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종말, 스스로의 정체성 잃을 때 시작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발코니에 서 있다.
연합/EPA
더욱이 끔찍한 사실은 중국이 이제 덜 위협적으로, 더 예측 가능한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에 등을 돌려서가 아니다. 미국이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대만 유사시 미군의 협조 요청을 두고 "그건 악몽"이라 말하며, 필리핀조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하물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같은 중립적 국가들은 이제 선택의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권위주의 국가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닮아가고 있는 질서 또한, 바로 그런 세계다. 문제는 중국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그런 세계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이 잃고 있는 것은 단지 시장 점유율이 아니다. 미국이 놓치고 있는 것은 '가격(price)'이 아니라, '가치(value)'다. 그 가치는 미국이 세계를 설득하고 자유주의 질서를 주도해 온 기반이었다.
그 가치를 놓는 순간, 세계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믿지 않게 된다. 민주주의의 종말은 외부의 침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을 때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잊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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