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평안하시라 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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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경무대에서 퇴거해 이화장에 들어간 날, 스스로를 대학생으로 소개하며 열렬한 충성심을 표시한 청년들이 있다. 4·19혁명 전날인 1960년 4월 18일에 반정부 시위를 격화시킨 학교인 고려대학교에 다닌다는 청년도 그 속에 있었다.
하야 성명 발표 이틀 뒤인 28일 오후 2시 반, 이승만 부부는 방탄차인 캐딜락을 타고 경무대를 나왔다. 이 차량이 지금의 서울 대학로 인근인 이화장 정문에 도착한 것은 2시 50분이다. 사저로 들어간 이승만이 담장 너머로 친이승만 시위대를 내다보는 사진이 실린 29일 자 <동아일보>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 박사가 들어간 이화장 대문 옆 담엔 '평안하시라 여생', '할아버지 만세'라고 쓰여진 백지가 붙어 있었다. 이화장 정문 앞엔 50명 이상의 보도원들과 다수의 노인·부녀자들이 경비헌병의 제지를 무릅쓰고 모여들어 있었다.
하오 3시 20분경, 돌연 모 대학생이라고 자칭하는 23세의 한 청년은 찦 위에 올라가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십시다'라고 외쳤을 때 군중 가운데서 박수 소리가 났다. 이를 본 고대(高大)의 일(一) 학생이 그 찦 위에 올라가서 '우리는 깨긋이 하야한 이 박사의 정치적 양심을 받아들입시다. 우리는 값싼 동정심에서 벗어납시다'라고 외치자 군중은 다시 박수를 쳤다."
이것이 연출된 장면이라는 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 친위세력에 의해 쉽게 노출됐다. 29일 자 <경향신문>은 "관권의 잔당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들이 허위 선전을 퍼트리기에 여념이 없다고 전했다.
"관권의 잔당들은 데마를 퍼트리기에 여념이 없다. 학생의 이름을 도용한 많은 단체의 이름으로 이 박사 하야 반대의 데모를 한다는 유언을 각 신문에 전화로 통고하는 유령들도 있는 것이다."
친위세력은 언론사뿐 아니라 야당 간부들에게도 데마(demagogy, 선전 선동)를 유포했다. 위 기사에 따르면, 퇴거 당일에 이승만 측근 중 하나는 "지금 이 박사 하야를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읍니다"라며 "한양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벌써 움직였답니다"라는 헛소문을 민주당 지도부에 퍼트렸다. 그는 "이런 사태를 수습하려면 국회에서 이 박사 하야 만류 건의라도 내야 하지 않겠소?"라고 민주당에 천연덕스럽게 제안했다.
경무대 퇴거에 맞춰 이승만 지지 시위 연출
어느 대학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를 반대하고 퇴거일에 지지 시위를 벌였다는 이승만 친위세력의 선전전은 누구보다도 해당 대학 학생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의 반응을 30일 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알렸다.
"이 박사가 경무대를 떠나던 날 자유당의 모모(某某) 전 간부가 최후 발악으로 '한양대학과 연세대학에서 하야반대 데모를 한다더라'고 거짓말을 꾸며댔다는 소식은 순결한 학도들에게 적지 않은 불쾌감을 준 모양 ···.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습성이 되었겠지만, 하필이면 연세대학과 한양대학을 끌고 들어가는가'라고 흥분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경무대 퇴거에 맞춰 이승만 지지 시위를 연출한 것은 이승만과 측근들이 국민들의 정서를 가벼이 여긴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국민들이 채찍을 든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의 복귀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거짓 선전전을 벌였다. 노여워하는 국민들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 세력은 단순히 정치 동업자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물러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몰락은 그해 3월과 4월에 선거부정과 비상계엄 및 대국민 발포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에 더해, 이전부터 민간인 학살과 친일청산 방해 등을 벌여 국민적 원성을 스스로 축적시킨 결과였다. 그처럼 세상에 큰 죄를 짓고 경무대를 나오는 그 순간에도 그런 '장난'을 칠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부부의 퇴거는 온 국민들의 관심사였다. 국민들 가운데에서 나온 반응 중 일부는 이승만에게 호의적으로 보도됐다. 29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지만 길거리 시민 반응과 관련해 "연도에 섰던 시민들은 이 박사의 승용차가 지나갈 때 혹은 박수로서 하야하는 이에게 이별의 뜻을 표시"했다고 묘사했다. 이런 기사는 다른 신문에서도 발견된다.
그날 일부 극우세력이 이승만 지지 시위를 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길거리 풍경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에는 부정확한 데가 있었다. 이승만 부부의 차량을 보고 거리의 시민들이 박수를 친 것을 잘못 해석했거나 그릇 전달한 측면이 있었다.
위 날짜 <동아일보>에 또 다른 기사를 쓴 기자는 "길가에 도열한 군중 틈에서는 박수를 쳤으나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다보면서 저마다 감개무량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일부 시민들이 박수를 쳤치만 대다수 시민들은 무표정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감개무량한 듯 침묵"이라는 표현을 써서 무표정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퇴거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무시한 결과
당시 국민들 대부분은 시위에 참가했거나 아니면 시위를 지지했다. 그런 사람들이 무표정하면서 감개무량한 듯한 침묵을 보였다. 2월 28일부터 시작된 전국적 시위의 결과로 대통령을 끌어낸 국민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그것은 절대로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없었다.
같은 날짜 <경향신문> 기사를 쓴 기자는 이승만의 퇴거 모습이 "안팎이 피로 물든 경무대를 뒤로 해야 하는 그는 남녀 시민들에게 오히려 가지가지의 회상과 그지없는 동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가지가지 회상과 그지없는 동정"이라는 표현은 "무표정한 얼굴", "감개무량한 듯한 표정"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12년간 지긋지긋했던 악당을 어렵사리 쫓아낸 사람들이 무조건 통쾌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이런 착잡한 반응을 보이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이다.
국민들은 이승만의 하야 전에는 경찰의 발포 속에서도 반이승만 시위를 벌였다. 그의 하야 뒤에는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며 서울 남산에 올라가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1960.8.24). "무표정한 얼굴", "감개무량한 듯한 표정", "가지가지 회상과 그지없는 동정"의 의미는 이런 장면들과 연관 지어 해석돼야 한다.
그러나 이승만과 측근들은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도리어 정체불명의 한양대생·고대생·연대생 등을 내세워 친위 시위를 연출하고 권좌 복귀를 꿈꿨다. 이들은 이승만을 연호하는 소수 극우세력의 목소리만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도 그런 극우세력을 구경하느라 담장 위로 얼굴을 드러냈다.
아전인수격으로 상황을 해석하며 대세를 외면하는 그 같은 태도는 이들의 정신건강을 보호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국가적 불이익으로도 이어졌다. 국민적 분노를 무시하는 태도는, 사법 처벌을 기다리며 자중해야 할 이승만이 잠깐의 폭풍을 피해 보자며 하와이로 달아나는 어이없는 사태로 연결됐다.
물론 이승만이 아주 떠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몇 달간 나가 있겠다며 여행 가방도 조촐히 준비했다. 그러나 단기건 장기건, 국민들의 심판을 가벼이 여기며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라타는 행동은 자신의 경무대 퇴거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날 연출된 친위 시위는 이승만 집단이 국민들의 분노를 가벼이 여기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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