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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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과 윤석열 정권이 8년 간격을 두고 몰락하는 과정에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도 한몫했다. 두 정권이 국민 의식을 개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사전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 연도가 임시정부 수립 시점인 1919년이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점인 1948년이냐' 하는 건국절 논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수립됐다는 논리는 3·1운동의 결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한다. 박근혜·윤석열 두 정권은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임시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이 싸움은 이명박 정권 때도 시도됐다. 이명박 정권은 1919년으로부터 60년 뒤가 아닌, 1948년으로부터 60년 뒤인 2008년 5월 22일에 국무총리 소속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총리실이 전날 배포한 보도자료는 위원회 고문단 14명의 첫째 자리에 친일파 백선엽을 위치시켰다. 그해 5월 22일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들의 광우병 우려와 촛불집회를 '광우병 괴담'으로 폄하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국민들을 더욱 화나게 만든 날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권은 광우병 촛불집회의 파고 속에서도 건국절 문제를 밀어붙였다. 그해 8월 3일,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을 비롯한 13명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지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거센 반대의 파고를 넘지 못해 9월 12일에 법안 제출이 취소됐다.
이 일은 박근혜 정권 때 다시 시도됐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로 침통해 있을 때인 2014년 9월 2일,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8월 15일을 광복절 및 건국절로 지정하는 국경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1919년 4월 11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됐음을 부정하는 시도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시도에 힘을 실어줬다. 일례로, 2016년 광복절 경축사 첫마디에서 그는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에는 광복이 있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건국이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도 1919년 건국을 지속적으로 흔들었다. 정부 출범 3개월 뒤에 나온 2022년 광복절 경축사도 그 일례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1945년 8·15 해방을 언급하면서 "그 이후 공산세력에 맞서 자유국가를 건국하는 과정"이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고 발언했다. 건국을 1945년 이후로 늦추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반공운동과 뒤섞는 발칙한 시도였다.
윤석열은 다른 자리들에서도 1948년 건국을 집요하게 거론했다. 작년 7월 4일의 한국자유총연맹 70주년 기념식 축사 때는 "광복 이후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이 땅에 자유의 가치를 심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셨습니다"라고 발언했다. 그는 닷새 뒤의 하와이 동포 간담회 때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언급했다.
임시정부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3·1운동은 10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 제정된 1948년 헌법의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첫 구절에서 선언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뿌리가 3·1운동에 있다는 것을 친일세력도 부인하기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친일세력은 독립운동가들과 반민특위는 억눌렀어도 3·1운동 자체는 억누르지 못했다.
3·1운동이 그처럼 신비한 힘을 갖는 것은 한국인들이 이 운동을 하늘처럼 떠받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3·1운동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한국인들은 3·1운동을 숭배하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3·1운동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3·1운동의 결과물인 임시정부가 실질적 정부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연합단체의 기능은 수행했어도 정부의 기능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임시정부를 소중히 여긴다. 이는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과물인 데다가 제한적이나마 독립운동에 기여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관련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용적인 또 다른 이유에도 기인한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명제가 힘을 발휘하려면, 국가의 핵심 요소인 정부의 존재가 전제돼야 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제국 및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가졌다는 논리가 인정되려면, 일제와 총독부에 맞서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실용적 이유에서도 한국인들은 임시정부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또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식민지배와 친일세력을 법적으로 단죄하기도 수월해진다. 한국인들이 독자적인 정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인정돼야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친일세력이 일제에 부역한 일은 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쉬워진다.
대법원은 신일본제철 강제징용에 대한 2012년 판결문에서 임시정부 법통의 계승을 선언한 헌법 전문을 언급한 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볼 때"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 뒤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이라고 판시했다.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면 일제 지배와 친일을 법적으로 청산하기가 쉬워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판례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문구를 넣은 일을 주도한 1987년 당시의 40대나 50대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거나 그 직후에 태어난 세대다. 이 세대는 헌법 전문에 3·1운동만 규정되고 임시정부는 규정되지 않은 시절을 오랫동안 경험했다.
4·19혁명·반유신투쟁·부마항쟁·광주항쟁 등을 겪은 그 세대가 임시정부를 헌법에 넣은 것은 3·1운동의 의의를 제대로 살리고 불행한 과거를 명확히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해방 이후 40여 년간의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국민적 상식 벗어난 건국절 논란

▲2023년 8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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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윤석열 정권은 건국절 논쟁을 일으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그들은 감히 3·1운동에 대해서는 정면 도전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3·1운동의 결과물인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태도는 그들이 3·1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노출시켰다. 그들이 임시정부를 흔드는 것은 3·1운동에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3·1운동에 애착을 갖는 일반 국민들이 그들을 반역사적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보편적 상식을 가진 국민들이 볼 때, 그들은 유관순을 탄압한 세력과 같은 편이었다.
박근혜 집권기인 2015년 8월 19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건국 연도가 1919년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63.9%다. 1948년이라는 응답은 21.0%였다. 경북·대구에서는 두 비율이 64.0%와 16.3%로 나타났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는 51.9% 대 27.3%였다.
이런 조사 결과는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될 게 하나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건국절 논쟁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니, 중도층뿐 아니라 보수층에서도 박근혜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건국절 논쟁은 윤석열 정권의 입지도 축소시켰다. 작년 8월 19일 보도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윤 정권 지지율이 일주일 전보다 2.9%포인트 하락한 30.7%로 나타났다. 하락 원인에 대해 리얼미터는 "민생과 특검법, 거부권 등에서 대치 정국이 이어지는 가운데 건국절 추진 논란과 광복 사관 대립에 따른 국정 불안정 요인에 지지율이 반응했다"는 분석을 언론에 내놓았다.
국민적 상식을 벗어나는 건국절 논란은 두 정권의 지지율을 떨어트리고, 그들이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게 만들었다. 이는 그들이 탄핵을 당하는 데도 일조했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지만 한민족은 3·1운동의 결과물을 소중히 여긴다. 임시정부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임시정부가 대단한 힘을 가졌던 게 아니다. 한국인들이 3·1운동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임시정부의 힘도 나온다.
박근혜·윤석열 정권은 그런 임시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외국 헌법도 아니고 자국 헌법에 규정된 임시정부에 맞서 싸운 일은 그들이 반헌법 세력으로 규정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100년 전인 1925년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일까지 감안하면, 임시정부가 날려버린 대통령은 도합 셋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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