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12 15:38최종 업데이트 25.04.1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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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맥주 박물관에 있는 100주년 기념물윤한샘

"엄마야!"

칭다오 자오둥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지하철. 문 앞에 있는 시장바구니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옆에 있던 직원이 펄쩍 뛰었다. 바구니 한쪽으로 발톱이 드러난 닭발이 삐죽 나와 있었다. 아마 중국 어르신들이 어디서 장을 보신 모양이다. 어릴 적 시장에서 생닭을 튀겨주던 기억이 떠오른 나와 달리 20대 직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나 보다.


칭다오는 15년 만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회사 워크숍을 칭다오로 결정했다. 양조 맥주와 음식을 파는 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을 워크숍 장소로 잡는 편이다.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칭다오는 맥주는 물론이거니와 맛있는 요리도 먹을 수 있어 괜찮다 싶었다. 게다가 올해까지 시행되는 무비자 정책이 꽤 매력적이었다.

2박 3일 일정에 전반적인 비용도 국내보다 비싸지 않았다. 직원들이야 회삿돈으로 비행기 타는데 당연히 반대할 리 없었다. 사업차 다녀왔었던 예전에 비해 오롯이 맥주 식도락만 하러 가니 내 마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정작 떠날 준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아시아의 갈라파고스?

칭다오 지하철 노선도윤한샘

오랜만에 가는 중국이라 유튜브와 블로그로 정보를 검색하는데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요즘 중국은 큐알 코드로 결제한다는 뉴스를 듣기는 했지만 현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식당과 마트는 물론 지하철, 택시, 심지어 야시장에서도 큐알 코드가 필요했다. 굳이 스마트폰에 중국 앱을 깔고 계좌와 연결시키는 '노력'을 해야 했다.

구글 지도를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다. 중국 지도 앱에는 영어를 전혀 쓸 수 없었다. 자칫하면 완전 까막눈으로 중국 거리를 다녀야 했다. 번역 앱이 있긴 하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15년 전에는 왜 불편하지 않았지? 떠올려보니 그때는 현지에 사는 지인과 돌아다녔었다. 종이지도를 보며 손짓발짓할 용기도 있었고. 가끔 기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터에 젊은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그랬다. 귀찮아할 것도 같았고. 할 수 없지. 이럴 때 유튜브와 챗 GPT가 스승이다. 열심히 찾고 물어보며 중국 큐알 앱과 택시 앱도 깔고 트레블 카드도 만들어 돈을 넣어 놨다. 트레블 카드에 연결시키면 따로 환전할 필요 없이 현지 돈으로 결제되는 것도 신기했다.

구글 앱은 안 됐지만 아이폰 지도를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목적지를 정하고 경로를 저장했다. 솔직히 칭다오 맥주 박물관 정도만 다녀와도 큰 불만은 없었다. 밥이야 보이는 식당에서 먹으면 되고.

찐 맥주 도시, 칭다오

칭다오는 중국 산둥반도 남쪽 끝, 서해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오래전부터 한국 기업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 도시의 역사는 맥주와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1898년 독일은 칭다오를 점령하고 99년 간 조차 조약을 맺었다. 조차란 영토를 빌려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일본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칭다오는 독일의 조차지였다.

독일은 건물, 도로, 상하수도, 학교, 관청, 교회를 건설하며 도시 전체를 유럽 스타일로 재편했다. 자연스레 구시가지는 다른 중국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독일풍 건물들과 천주교 성당이 남아있다. 도로의 구획도 반듯하고 바닥도 유럽처럼 돌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 1903년 독일인들이 남기고 간 맥주가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칭다오는 맥주 도시였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오자마자 곳곳에 칭다오 맥주 로고가 보였다. 마치 모든 음식점에서 칭다오를 한잔하라고 꼬시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다. 칭다오 맥주 박물관과 타이동 야시장. 이 도시에 오는 관광객들은 반드시 들르는 관광 코스였지만 꼭 사고 싶은 게 있었다.

한국에서 질리게 칭다오 맥주를 마신 나에게 평범한 칭다오 맥주는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박물관에는 한국에서 마실 수 없는 맥주가 있었다. 칭다오 원주, 이 맥주는 필터링하지 않는 오리지널 칭다오다. 원주를 파는 곳이 꼭 박물관만 있는 건 아니다. 꽤 많은 식당에서 원주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양조장에서 갓 나온 맥주와 비교할 수 없다는 건 자명했다. 칭다오 맥주 박물관에서 신선한 원주를 사고 싶었다.

칭다오 맥주 박물관

칭다오의 옛날 맥주병들윤한샘

앱을 이용하니 순식간에 택시가 잡혔다. 타고 보니 택시가 아니다. 우버 같은 시스템이었다. 이용 금액은 한국의 반 정도였다. 교통뿐 아니라 음식도 한국보다 저렴해 뭘 해도 부담이 없었다. 운전 환경은 우리의 9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직원들에게 횡단보도 건널 때 차를 믿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래도 15년 전보다 나아졌다. 그때는 역주행하는 차를 보며 기겁했었는데.

도시에 솟은 빌딩은 서울을 방불케 했다. 마천루 사이를 가득 채운 자동차를 보며 외형적으로 발전한 중국을 체감했다. 앱으로 표시되는 경로는 오차가 없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식당이 즐비한 도로 옆에 차가 멈췄다. 비어스트리트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한 모양이다. 우리에겐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형형색색 간판들이 보였다. 지역 음식과 칭다오 맥주를 파는 식당들이었다.

이제 박물관 입구를 찾아야 한다. 다 방법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리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이미 한 무리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빨간 벽돌을 한 유럽식 건물, 딱 봐도 칭다오 맥주 박물관이었다.

입장을 위해서는 표를 사야 했다. 다행히 매표소에 한국어가 보였다. 금액에 따라 여러 코스가 있었다. 나는 128위안, 약 25,000원짜리 티켓을 끊었다. A, B관을 볼 수 있고 6잔의 샘플 맥주를 시음할 수 있는 코스였다.

칭다오 맥주 박물관 외관은 유럽 양조장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했으며 고풍스러웠다. 넓은 광장을 둘러싼 붉은 벽돌 건물들은 온전한 독일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설픈 르네상스 스타일, 한 때 유럽을 꿈꿨던 일본의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독일 다음 1922년까지 칭다오 맥주의 주인이 일본이었다. 독일, 일본, 중국의 색깔을 덧입힌 모습 또한 역사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칭다오 양조장은 1공장과 2공장이 있다. 이곳 맥주 박물관은 본사가 있는 1공장이다. 2공장은 차로 22분 떨어진 리창구에 있다. 한국에 수입되는 칭다오는 모두 1공장에서 생산된다. 2공장 맥주는 중국 현지인들에게 더 저렴하게 판매한다고 한다. 100주년 기념물 주위로 높게 솟은 굴뚝과 모락모락 김이 나오는 시계탑을 보니 맥주 양조장에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맥주 역사가 곧 칭다오 역사

옛 칭다오 광고. 개항기의 모습이 보인다.윤한샘

빨간 벽돌의 디귿자 형태를 한 A관은 칭다오 맥주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1903년 영국과 독일 상인들이 투자한 장비의 총용량은 2000톤이었다. 지금 한국에 있는 웬만한 소규모 양조장보다 작은 규모다. 밝은 색 라거, 필스너와 어두운 색 라거, 둔켈을 생산했고 주로 상하이나 홍콩 같은 대도시로 수출했다. 1906년에는 뮌헨 맥주 대회에서 상도 탔다고 한다.

내부에는 초기 장비들과 오래된 자료들이 가득했다. 사진, 서류, 도면, 편지, 용기, 메뉴 등 120년 기억을 품은 유물들이 시대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결코 무색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건 광고였다. 맥주가 생소했던 시절, 중국인들에게 맥주를 알리고 어필하려 했던 흔적들이 재미있었다. 초기에는 서양인 광고모델이 등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 문화와 개항기 중국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1회 칭다오 맥주 축제 오프닝 세리머니에서 사용했던 나무통도 전시되어 있었다. 별 거 아닌 맥주 통인데 이뻐 보였다. 문화의 힘이란. A관 후반부는 현대적인 공장 모습과 각종 수상들, 전 세계 판매량 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은근히 샘이 났다. 아시아에서 가장 이름 없는 맥주가 한국의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맥주 브랜드를 갖고 있다. 누가 와서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맥주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답할 자신이 없다. 제품보다 문화적 자산을 먼저 쌓아야 하는데, 카스와 테라는 아직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

B관은 옛날에 사용했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었다. 옛 당화조와 끓임조, 병입 용기, 냉각기도 있었고 오픈 발효조와 숙성을 위한 거대한 나무통도 보였다. 단순히 전시에서 끝나지 않고 발효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초기 맥주 장비들윤한샘

옛 오픈 발효조의 모습윤한샘

칭다오뿐만 아니라 체코, 영국, 독일, 미국 양조장에 갈 때마다 작은 흔적도 역사로 보전하려는 노력들이 부러웠다. 우리는 너무 빨리, 자주 바꾼다.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의 맥주 역사도 곧 100년이다. 두 회사 모두 맥주가 자신들의 뿌리이자 영혼이다. 영등포에 남아있는 초라한 당화조를 제외하고 우리 맥주 역사를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심지어 맥주 이름도 계속 변한다. 오비맥주, 오비라거, 카스, 넥스, 크라운맥주, 하이트, 테라, 켈리 등 리뉴얼이라는 명목은 이해하지만 그 속에 레거시(유산)는 없다.

역사를 보존하면 정체성이 된다. 정체성은 브랜드를 만든다. 사람들은 브랜드 안에 켜켜이 축적된 무형의 자산을 즐기고 소비한다. 심지어 홈페이지에 가도 카스와 테라의 브랜드 스토리를 읽을 수 없다. 한국 맥주가 중국, 일본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음에도 항상 평가절하 받는 이유다.

A, B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작은 잔에 맥주를 따라주고 있었다. 원주였다. 직원들도 신났다. 연신 사진을 찍는다. 원주는 필터링을 하지 않아 불투명하다. 맛있을까? 당연하다. 하이네켄, 필스너 우르켈,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같은 양조장 투어 뒤에 마시는 맥주가 맛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나는 지금 칭다오 역사를 즐기는 중이다.

칭다오 원주 샘플러윤한샘

야시장에서 맥주 춤을

칭다오 맥주 박물관 투어를 마친 후, 10분 거리에 있는 타이동 야시장을 방문했다. 엄청나게 다양한 길거리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약간의 도전 정신이 필요한 음식도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 꽂힌 건, 거리에서 파는 생맥주였다. 타이동 야시장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생맥주 기계를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불법이다. 생맥주는 주류 판매 허가를 받은 일반음식점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맥주를 파는 장면도 생경한데, 생맥주라니.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이 재미있었다.

원주뿐 아니라 여남은 종류의 칭다오를 고를 수 있었다. 원주가 다른 맥주보다 500원 정도 비쌌다. 당연히 첫 맥주는 원주. 큐알 코드로 주문을 마치니, 350밀리 정도 플라스틱 용기에 맥주를 담아줬다. 산소와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페가스가 달려 있었다. 페가스는 이산화탄소로 병 안을 충전해 맥주의 산화를 방지해 주는 장비다. 예전에 봉지에 맥주를 담았다고 하는데, 아마 위생 문제로 사라진 것 같았다.

타이동 양시장윤한샘

생맥주를 따라주는 모습윤한샘

맥주를 들고 야시장 음식을 먹는 경험은 짜릿했다. 여기저기 칭다오 맥주가 보였다. 유럽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중국에서 보다니, 솔직히 중국 백주를 마시는 게 더 어려웠다. 15년 전에는 이 정도로 맥주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확실히 칭다오는 맥주 도시 맞다.

한국 맥주 100년 역사 중 자랑할 만한 브랜드가 없다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문화가 없다는 의미다. 맥주도 우리 술이다. 우리 역사와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으면 우리 술이다.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 맥주 박물관을 상상해 본다. 50년 전 맥주 장비와 양조장 사진, 맥주병과 라벨, 브랜드 변천사와 그 속에 있는 아픔까지, 과거를 드러내면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공감은 애정으로 변해 충성심으로 굳어진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면 오리지널 오비맥주나 크라운 맥주를 한 잔씩 주면 어떨까?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드는 것도 노력이다. 늦지 않았으니, 한국에도 외국인들이 투어를 올 만한 박물관이 생기길, 제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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