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9 06:29최종 업데이트 25.04.09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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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지난 2024년 12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남소연

마은혁 재판관님,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극우 보수 정치권과 언론의 이념 공세에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다시 한 번 위로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마은혁 헌법재판관을 처음 본 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쯤 광화문 부근의 변호사회관에서 였습니다. 어느 노동법연구소가 주최한 노동법 강의였습니다. 수습 법률가와 언론사 노동담당 기자,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참여한 노동법률강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어느 지방법원의 판사였던 당신은 강의를 위해 업무 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수업을 했습니다. 강의에 조금 늦었던 당신은 청중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분초를 아껴가며 초여름 후텁지근한 강의실에서 와이셔츠가 땀범벅이 될 정도로 열정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노동조합과 사측의 단체교섭을 지원하는 저로서는 당신이 강조한 단체교섭 제도에 대한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표면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합의하고 근로계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민법상 노동자와 사용자는 과연 대등할까요? 월급을 주는 사장님에게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발생하는 불합리한 사항을 바꿔 달라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노동자가 집단으로 단결하여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실질적 대등성을 실현하는 제도로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노동시장에서 노사 간의 평등을 가져오는데 단체교섭 제도가 정말 중요하기에, 정말 섬세하게 고민하고 제도를 연구하여 활용해야 한다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이후에도 당신은 계속하여 시민과 법률가, 활동가들을 상대로 노동법률 교육을 해왔습니다. 어느 강의 후기에는 "노동 관련 판례를 모두 체크하고 있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게 느껴질 만큼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시각을 보여줬다"라는 말이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마은혁에 대한 근거 없는 색깔 공세

지난해 12월 국회 추천으로 인사청문회 등 모든 과정을 거쳐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되었음에도 최상목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당신을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국회 합의가 부족했다는 이유였으나, 윤석열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 언론과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당신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 좌편향 판사라고 비난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과 국민의힘이 당신을 공격했던 주된 이유는 과거 당신이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 가담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38년 전인 1987년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을 고문해 죽였습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고조된 민주화의 열망은 6월 항쟁을 촉발했습니다.

대학생을 비롯해 노동조합과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당신은 노회찬 전 의원을 비롯한 인천과 부천지역의 노동운동 활동가와 민주화 세력, 그리고 대학생들과 함께 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하기 위해 1987월 6월 26일 부평에서 인민노련 창립을 선언합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결성되었지만, 인민노련의 창립 배경에는 군사독재 정권이 재벌과 가진 자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했던 개발독재 시대의 암울한 경제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인민노련 강령인민노련의 당시 사회정치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활동 방향을 담은 강령. 첫문단에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 하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노회찬 재단

강령 제일 앞줄에서 인민노련은 사회를 지탱시키고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인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다운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최소한의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소수의 재벌기업을 키워 수출 확대로 국가의 발전을 꾀하는 산업정책을 펼칩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안보정책을 펼칩니다. 오늘날 '한강의 기적'으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도 있지만 개발독재의 이면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궁핍과 인간적 멸시, 정치적 무권리 상태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에 분개하여 1970년대에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할 정도였습니다.

1980년에 들어서도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 역시 수출기업의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고 1980년 후반에 가서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민주화의 열망과 결합하여 전두환 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을 비롯하여 인민노련이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등 노동3권 확보를 통한 노동운동의 자유 쟁취와 주 8시간 노동제, 실질생계비 보장을 위한 최저임금제 쟁취, 건강한 작업환경 조성 등 지극히 상식적인 노동권 실현을 앞장서 제기하고 싸워 온 점에 감사합니다.

물론 인민노련의 활동 방식에서 정부에 맞서 물리적 투쟁을 전개하는 등 당시의 실정법 위반 사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루탄과 군경을 동원한 고문과 살인 등 군사독재 정권의 살인적인 탄압에 비할까요. 지금 내란범 윤석열을 옹호하며 소환되는 '국민저항권'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에 들어맞는 개념입니다.

여하튼 당신은 인민노련 활동 이후 사법시험을 거쳐 법관으로 30년 가까이 봉직했습니다. 노동법 전문가로 시민들에게 노동법의 원리를 교육하고, 근로기준법 주해(박영사 출판) 등 노동시장 전문가들에게 기본서와 다름없는 노동법 기본서를 집필하는 등 노동시장에 불균등한 노사관계를 바로잡는데 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북한을 맹종하는 이념적 편향을 지적해 왔던 당신에게 주사파라고 허위 선동을 했던 극우 유튜버, 판사로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면서도 과거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으니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란 근거 없는 색깔론을 제기하는 보수 언론, "내가 아는데"라며 색깔 공세를 펼치는 과거 당신의 동료였던 극우 정치인들의 공세 속에서 헌법재판관이 된 당신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라 믿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노사갈등과 헌재의 역할

전태일 열사 54주기인 지난 2024년 11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 다리에서 전태일 재단이 마련한 추모 분향소가 마련됐다.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이정민

우리 사회 경제적 양극화와 이념 갈등 속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여전히 막중합니다. 우리 사회는 아마도 당신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고통받고 차별받는 중소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 무늬만 자영업자인 노무 제공자들의 노동인권 문제에 대한 솔로몬의 지혜를 요구할지 모릅니다.

노사 간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최저임금제의 직종·지역별 차등 적용 문제나 근로 시간 상한제를 두고 경영계는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와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노동계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문제나 단체교섭의 사용자 범위 확장을 주장하며 현행 노동관계 법령이 노동자의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 인식되는 헌법재판소가 감당해야 할 숙명입니다. 안타깝게도 38년 전 당신이 분노했던 저임금에 10시간,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민노련이 "빈발하는 산업재해와 직업병 앞에 건강과 생명이 방치되고 있으며 기업주에 맞서 파업할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던 38년 전의 불합리한 노동시장의 관행은 하도급 노동자와 플랫폼, 프리랜서 노무 제공자들로 옮겨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지혜로 노동자의 노동인권 개선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헌법재판소가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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