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사진. 가운데 안경쓴 남성이 이묘묵이다.
위키미디어 공용
친미파의 동향이 국운의 변화를 반영한 구한말의 현상은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온 1945년에도 나타났다. 8월 14일까지 미영 격멸을 외치던 친일파들이 9월 들어 갑자기 친미파로 변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통역관 이묘묵이다.
을사늑약 3년 전인 1902년 12월 9일 평양에서 출생한 이묘묵은 1922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사로 있다가 192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니온대학·시러큐스대학·보스턴대학·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뒤 1931년에 보스턴대학 철학박사가 됐다. 그 후 시러큐스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흥사단에 가입해 민족주의 활동도 하던 그는 1934년에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3년 뒤, 그의 인생 노선은 뒤바뀌었다. 교수 생활과 더불어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활동을 하던 그는 1937년에 대규모 공안사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를 받은 뒤 친일파로 돌아섰다. 공개적으로 전향 성명서를 발표한 그는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화숙과 관변단체인 대동민우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황도협회 등을 무대로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미국에서 11년간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경력을 근거로 반미 선전전인 '미영배격 설전(舌戰)'에 앞장섰다. 그가 하는 강연의 핵심은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였다. 총독부 기관지인 1941년 12월 31일 자 <매일신보> '영·미 배격 설전대, 기독교 수뇌를 동원'은 미영과 인연이 깊은 인사들이 두 나라의 "흉악한 이면"을 폭로하기 위해 평남·평북·황해도에서 강연회를 열게 됐다면서 황해도 해주에는 이묘묵이 파견된다고 보도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 이묘묵 편에 소개된 전향성명서는 미영 격멸을 부르짖는 그가 어떤 논리들을 준비했는지 보여준다.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에서 지내던 중 그 나라의 찬란한 물질문명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이를 내심 부러워하던 중 이것이야말로 민족자결의 혜택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 나라의 물질문명은 민족자결의 결과가 아니라 천연자원의 혜택에 근거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미국에 온 본래의 목적인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1918년에 종전된 제1차 세계대전 이래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친일파로 변신한 이묘묵은 '미국이 잘사는 것은 민족자결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천연자원이 많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감을 공격하는 논리였다.
전향서에서 그는 "유럽 및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며 시찰한 결과, 비로소 우리 제국의 세계적 숙명 및 활동이 세계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외국에 나가 보니 일본이 최고더라는 이런 논리도 준비한 상태에서 그는 친일 선전전에 뛰어들었다.
강연 외에 기고를 통해서도 그는 친일을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묘묵 편은 "1941년 6월호 <조광>에 기고한 '장편(掌篇) 미국사 – 미국의 어제와 오늘'과 1941년 11월호 <춘추>에 기고한 '구주전쟁과 미국의 책동'을 통해 미국의 야만성을 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했다"라고 알려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입'과 '귀'과 된 이묘목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NARA / 눈빛출판사
1941년까지 연희전문 교수였던 이묘묵은 그 뒤 관변단체의 사무국에서 부역했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강연 및 기고를 통해 친일 수익을 얻던 그는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매우 극적인 변신을 선보였다.
미영 격멸을 부르짖던 친일파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극렬 친미파로 변신한 1945년 9월의 그 민망한 현장에서 43세의 그는 가장 두드러지는 존재였다. <통번역학 연구> 제23권 제2호(2019년)에 실린 박소영 한국외대 강사의 논문 '미군정기 통역정치 – 이묘묵을 중심으로'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날부터 벌어진 일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묘묵은 1945년 9월 9일 서울에서 일본 측의 항복 조인이 끝난 후 <코리아타임스>의 편집국장 신분으로 하지 사령관에게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던져 깊은 인상을 남겼고, 1945년 9월 11일 총독부 건물 2층 회의실에서 개최된 첫 국내외 기자회견에 기자로 회견 장소에 왔으나 당장 영어를 통역해줄 마땅한 사람이 없어 임시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사령관의 '가라앉은 음성까지 흉내내어 가며' 우리말로 옮겨주었고, 1945년 9월 12일 한국의 정계·문화계 대표 초청 면담 자리에서 통역관으로 하지 사령관을 수행하였으며, 9월 17일에는 국내 각 정치단체 대표와 정례회견 발표 자리에서 그의 전속 통역관으로 소개되었다. 불과 열흘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묘묵은 통역정치 최고봉에 올라 '공식적인 자리이건 사적인 자리이건 하지의 입이고 귀'가 되었다."
미군정 통역관들은 사실상 정치인이었다. 한국을 잘 모르는 미군 수뇌부를 대신해 인사문제나 행정문제 혹은 일본인 재산(적산) 불하 등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통역정치의 중심에, 8월 14일까지만 해도 미영 격멸을 외쳤던 이묘묵이 있었다. 이런 캐릭터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38도선 이남에서는 을사늑약 이래 40년 만에 친미파가 갑자기 급부상했고, 이는 한민족의 운명에 새로운 구름이 끼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1905년과 1945년에 친미파의 동향은 국운의 바로미터였다. 1905년에는 대표적 친미파가 갑자기 대표적 친일파로 변신하면서 피보호국이 됐고, 1945년에는 친일파들이 갑자기 친미파로 변신하면서 또다시 보호를 받게 됐다. 이묘묵은 그런 흐름에 서 있었던 대표적 존재다.
미영 격멸을 외치다가 미군 앞에 나가 영어로 질문을 던지며 미군의 입과 귀가 된 이묘묵은 미군정의 한국 지배를 최일선에서 도운 뒤 영국의 품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친일인명사전> 이묘묵 편은 미군정 이후의 그의 인생행로를 이렇게 기술한다.
"1949년 국제연합 한국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같은 해 2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 5월 주영공사에 임명되었다. 1957년 2월 27일 주영공사 재임 중 영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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