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8 18:50최종 업데이트 25.04.0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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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벚꽃 개화를 맞이해 축제를 시작한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를 찾은 시민이 막 개화를 시작한 벚꽃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연합뉴스

벚꽃이 피었다. 이때가 되면 하얀 포말 같은, 달콤한 설기 같은, 때론 첫사랑의 두근거림 같은, 그래서 그 순백의 순결을 지키고 떠난 여인을 추억하듯 묘한 감정에 휩쓸린다. 그 애틋한 순정은 시간을 처음 마주한 갓난아이처럼 무색무취다.

벚꽃의 아름다움은 흐드러지게 나무를 뒤덮었을 때보다 꽃비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때의 아련함에 있다. 이는 소생과 소멸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이다. 짧은 기간 동안 화려하게 세상을 미혹시키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쓸쓸함은 인생의 무상함을 닮았다. 벚꽃이 피고 지는 메시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벚꽃은 자태를 뽐낼 때 채근해서 봐야 한다. 화들짝 피었다가, 화들짝 사라지기 때문이다. 찰나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비극의 정점이기도 하다. 한 잎, 한 잎이 모여 생명의 비장미와 극치미를 절정까지 끌어올렸다가 한순간에 불꽃처럼 꺼지는 모습은 극단적이다. 결국 꽃의 시작은 끝을 향한 몸부림인 것이다.

온몸의 진액이 광합성을 뚫고 마르고 닳아 색깔마저 새하얀 분홍빛. 일주일가량의 짧은 여정 속에서 순백과 낙화의 정경을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진창에 빠진 떨기는 밟히고 짓이겨지면서 참담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이는 곧 봄의 서막이다.

벚꽃이 후드득 일시에 떨어지는 건 개별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함께 피었다가 한꺼번에 진다. 찬란한 주검이다. 그 주검 끝에는 장렬한 소진을 견딘 잎새들이 푸르게 얼굴을 내민다.

꽃이 먼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잎이 나중에 피는 건 선화후엽(先花後葉)인 까닭이다. 이는 수분(受粉)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다. 잎이 무성하면 꽃이 가려지거나 곤충 접근이 어려워져서 수분율이 떨어진다. 또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을 통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겨우내 저장해둔 에너지를 가장 먼저 꽃 피우는 데 집중해 번식을 먼저 마치려는 전략인 것이다. 그리하여 벚꽃은 잎을 위해 잠시 잠깐 머무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대표주자다.

사쿠라 같은 정치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 인용을 선고한 4일 서울 중구 지하철 시청역 출입구에서 시민들이 선고 소식을 실은 신문 호외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됐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불과 8년 만이다. 열흘 붉은 꽃 없다 했거늘 그야말로 화무십일홍이다. 두 사람 모두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일치로 탄핵소추안이 인용됐다. 한 사람은 벚꽃이 채비도 하지 않은 3월 10일, 한 사람은 벚꽃이 개화한 4월 4일에 벚꽃엔딩을 맞았다. 대통령직을 1~2년 남겨놓고 후드득 낙화했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지나친 독선과 소통 부족이 파국의 씨앗이었다.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권력은 달콤한 칼이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칼일 수도 있다. 경쟁이 아닌 갈등, 상생이 아닌 아집으로 만든 권력은 꺾인다. 그 힘이 강할수록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권력자에게 미덕이 있다면 내려올 때 잘 내려오는 것, 내려올 때를 대비해 정치를 잘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을 두 명이나 끌어내렸다고 자랑할 만한 일인가. 아니면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을 두 명이나 뽑은 우리네 발등을 찍어야 하나. 20년 사이 세 번의 탄핵 시도(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추진까지 합치면 세 번이다)는 정치 후진국의 민낯이다. 그만큼 정치 현실이 어리석고 아둔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뽑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뽑은 사람의 잘못도 없지 않다. 대통령 파면을 놓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자찬하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물론 탄핵의 사유는 차고 넘친다. 다만 '낮에는 야당 행세를 하고, 밤에는 여당 노릇을 하는' 사쿠라 같은 정치를 계속 지켜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몇 년 사이에 벚꽃 구경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출퇴근길은 어두워 벚꽃을 보지 못하고, 잔업에 야간작업을 하다보면 벚꽃의 동태를 살필 겨를이 없다. 종종 주말까지도 일을 하니, 노동자에게 벚꽃은 마음속에서나 피고 진다.

특히 노동자에게 화무십일홍 정치는 관심 밖이다. 이번에 대통령이 파면됐을 때 주변을 살피니 모두 무덤덤했다. 되레 탄핵 얘기를 꺼내 든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정치와 멀어지기 위해 신문도 안 보고 방송도 틀지 않는다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중도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기피하고 외면한다. 어찌 보면 무당층(無黨層)인데,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정치적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는 무력감의 소산일 수도 있다. 대통령을 뽑을 때도,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뽑을 때도 누가 되든 '그 X가 그 X'라는 정치 불신이 강하다.

진창에 빠진 꽃비를 밟으며

헌재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인용이 발표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한 지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정치는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이 다 말아먹고 있는 듯하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도 강력해 정치인을 뽑는 것인지 연예인을 뽑는 것인지 그 뿌리가 모호하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확증 편향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한쪽 진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강력 지지층이란 얘기다. 어쩌면 윤석열도 눈과 귀를 닫은 콘크리트 지지층에만 의존하다가 패망을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끊을 수도 없고, 관심을 가져도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플라톤은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벌은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고. 그 말이 심장에 아프게 꽂힌다.

모처럼 주말에 도심 천변에 꽃구경을 나갔다. 주말 전날 내린 비에 꽃들의 정령이 거리에 쏟아져 뒹굴었다. 가장 절정일 때 비가 내려 주검이 된 꽃비였다. '화무십일홍 권력이여, 권력자여. 도대체 우린 언제쯤 가장 화려한 정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진창에 빠진 꽃비를 밟으며 내내 심란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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