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6 10:40최종 업데이트 25.04.0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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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25일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가 방청석에 먼저 나온 신동아그룹회장 부인 이형자씨(오른쪽)의 눈길을 받으며 국회 법사위 '옷 로비' 국정조사장에 들어서고 있다.연합뉴스

1990년대를 마감하는 해, 그리고 새천년을 1년 앞둔 1999년 들어서도 외환위기의 여파는 여전했다. 정보 기술(IT) 기반 벤처 열풍으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급격히 옮겨갔지만, 8퍼센트가 넘는 실업률은 여전히 보통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안한 일상을 살고 있는 서민들에게 울분을 안겨준 것은 이해 5월에 터진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된 사건으로 위기를 맞고 있던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이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대신 납부하였다는 의혹을 밝히려는 특검이었다. 밝혀진 것은 옷을 판매한 의상실 주인 앙드레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사실뿐, 그 이상은 밝혀진 것이 없었다는 조롱을 받고 특검은 종료되었다.


이해 6월에는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이 세계 불우 어린이 돕기 자선 공연을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다. 서울 공연 기자회견에서 마이클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의 많은 어린이는 어른들의 정치적 목적이나 욕심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이들을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우리의 임무이다." 그는 또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독일이 그랬듯이 한국도 곧 통일이 되길 희망하며, 그날에 다시 여러분과 함께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의 약속은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과 우리 민족의 무능으로 지켜지지 못했다. 마이클 잭슨이 다녀간 한 달 후에는 미국의 공룡 커피 기업 스타벅스가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1996년 일본 도쿄, 1999년 1월 중국 베이징에 이어 아시아 지역 세 번째 매장이었다. 이후 우리나라 커피 문화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외화 절약을 위해 커피 대신 국산 차를 마시자는 운동은 여전하였다. 소비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커피 업계는 광고로 어필하려고 노력하였다. 맥스웰하우스는 캔커피 광고에서 취업 준비생의 면접 장면을 다루었다. 면접에서 실수한 취업 준비생의 당황한 모습을 보여준 후 "나를 알아주는 커피, 맥스웰 캔커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이었다.

등장과 함께 성공 신화 쓰기 시작한 스타벅스

4월이 되자 ㈜대상은 테이크아웃 체인점 로즈버드커피클럽 창업 소식을 전하며 사업 참여자 모집 광고를 내보냈다. 국내 최초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로즈버드커피클럽 1호점은 1999년 6월에 문을 열었다.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이 어디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스타벅스나 로즈버드클럽 이전에 토종 커피 기업 할리스커피가 이미 문을 연 상태였다. 1998년 6월 할리스커피 1호점이 강남역 지하상가에 문을 열었다. 1998년 봄 개점을 준비하던 스타벅스의 개점이 연기되면서 준비팀에서 일하던 강훈씨가 그해 1월 퇴직한 후, 5개월 동안 함께 퇴직한 동료 2명과 준비해서 창업한 것이 할리스커피였다. 1999년 4월에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직영 2호점을 낸 이후 가맹점 모집을 시작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사카, 스타라이트, 쿠벅, 매그닉, 씨애틀에스프레소, 카페루카 등 30개 이상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이 운영 중이었다.

로즈버드커피클럽이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하고 할리스커피가 직영 2호점을 내던 1999년 4월 스타벅스가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앞에 서울 1호점 개점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7월에 접어들며 스타벅스 진출 소식은 더욱 빈번해졌다. 7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7월 27일에 스타벅스 서울 1호점이 이대 앞에 3층 규모로 문을 열 예정이며 2003년까지 전국에 44개의 점포를 열 계획이라고 보도하였다.

스타벅스는 매장 설립에 앞서 책으로 기업 이미지를 알리는 전략을 썼다. 서울 1호점 개점에 맞추어 스타벅스 최고경영자(CEO) 하워드 슐츠의 성공 신화를 담은 저서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 한글판이 출간되었고, 출간과 동시에 세간의 관심을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언론에서는 스타벅스가 뉴욕의 할렘가에 1호점을 열었다는 소식, 스타벅스의 커피 맛이 싱거워지면 디플레이션을 의심해야 한다는 유명 경제학자의 디플레이션 판별법 발표 소식, 스타벅스에서는 파트타임 직원도 한 달 교육 후 매장이 투입한다는 소식 등 흥미를 자극하는 소식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1999년 7월 27일, 서울의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스타벅스 한국 1호점이 문을 열었다. 당시 스타벅스는 전 세계 12개 국가에 2300여 개의 체인을 가지고 있었고 서울 1호점이 그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도 스타벅스는 등장과 함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하였다. 스타벅스의 등장은 한국인의 커피 취향뿐 아니라 문화 자체에도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켰다. 음식물을 들고 걸어 다니거나, 음료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것을 천박하게 여겼던 문화에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거리를 걸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이 젊음의 상징, 하나의 유행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컵이나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은 첨단 유행이었다. 낯설던 테이크아웃 문화를 친숙하게 만든 것은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는 예술적으로 볶은 최상의 커피를 마신다는 심미적 감성, 공정무역을 통해 구입한 커피 재료로 만든 커피를 마심으로써 커피 생산자를 도울 수 있다는 윤리적 의식, 그리고 재생 펄프로 만든 컵을 사용함으로써 환경 보호 운동에 동참한다는 사회적 책임감 등의 요소들을 적절하게 내세움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하였다.

서울 중구의 한 스타벅스 매장연합뉴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고

이해 8월 31일 우리나라 원두커피 전문점 1호로 1979년에 창업하여 20년간 새로운 커피 문화를 이끌었던 난다랑의 후신 밀다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변화하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이 배경이었다. 급격히 변한 신세대의 취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난다랑의 폐업, 스타벅스와 할리스커피의 등장은 우리나라 커피 문화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스타벅스의 등장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아메리카노가 커피 맛의 표준이 되기 시작하였다. 인스턴트커피를 커피로 부르던 오랜 습관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지만, 아메리카노가 커피 맛의 표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문제였다. 꽤 많은 커피 체인점과 골목 카페들이 스타벅스를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설치하고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등 에스프레소 파생(variation) 음료를 판매하는 것이 유행같이 번졌다. 물론 셀프서비스와 테이크아웃은 공통이었다. 이후 외국 브랜드 커피빈(2000년), 파스쿠찌(2002), 일리카페(2007) 등이 들어왔다.

국내 브랜드로는 엔제리너스(2000), 이디야(2001), 투썸플레이스(2002), 탐앤탐스(2004), 카페베네(2008)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상호는 달랐지만 제공하는 음료나 서비스 형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스타벅스와의 경쟁을 내세웠지만 스타벅스를 따라 하기에 바빴다.

1999년 9월 12일에는 MBC에서 현대사 발굴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첫 회가 전파를 탔다. 첫 회 주제는 '제주 4.3 사건'이었다. 당시 제주도민 이외에는 들어보지조차 못했던 낯선 이름이 4.3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큰 굴곡 중 하나였던 이런 항쟁조차 알지 말아야 할 한낮 '사건'으로 축소되어 언론 보도가 반세기 동안 막혀있었다. 정치가 역사를 지배하던 시절이다. 이 해에 등장한 유행어의 하나가 '당근이지'다.

2025년 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고 있다. 26년 전 난다랑이 가고 스타벅스가 왔듯이, 1900년대가 가고 2000년대가 왔듯이. 비록 무도한 대통령은 갔으나 부끄러움은 남아 있다. 초등학생조차 '당근이지'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준의 상식적인 판단을 기다리며 왜 무고한 국민 다수가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는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한 제도와 인간에 대한 수술과 단죄가 필요한 역사적 시간이다. 와야 할 것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 그리고 정상적인 민주시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한겨레 1999년 커피 관련 기사 일체.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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