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 산업단지 백지화 촉구 시위 248일차 마무리 집회"(2022.6.7) 사리면 주민 150여 명, 괴산군수 당선자, 괴산군의회 및 도의회 의원 당선자 참석
김용자
처음엔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김 이장의 리더십, 주민들의 결속력과 아울러, 공익법률센터 농본의 도움이 컸다. 하승수 대표에게 법적 상의나 검토를 요하는 연락을 보내면, 회신을 받기까지 단 몇 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아, 농본에겐 우리가 늘 1순위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어요. 늘 거대한 힘에 밀리는 것에만 익숙했었는데. '아, 이렇게 하니까 되는구나' 싶었어요. 치밀하게 다음 단계를 생각하면서 '본질'을 제대로 캐치하면 되겠구나. 무엇보다도 싸울 대상을 보기보다는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버텼어요."
산단을 막아낸 이후, 마을의 화두는 '돌봄'
군수가 바뀌고 산단은 백지화되었다. 마을에서는 '농촌공간정비사업'이 진행 중이다. 농촌공간정비사업은, 농촌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지원사업으로, 악취·소음·오염물질 배출 등 주민 삶의 질을 저해하는 시설을 정비·이전하고, 해당 부지에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조성해 주는 사업이다.
30년 넘게 동네에 악취를 풍겨온 돈사와 퇴비공장은 이 사업으로 감정평가 및 보상비를 받고 마을을 떠난다. 늦어도 내년이면 건물이 철거되고, 2027년엔 새로운 공간이 완성될 것이다.
향후 귀농 귀촌할 사람들과 원주민들이 교류할 것을 염두하면 지금의 마을회관은 비좁기 때문에, 다양한 도농 교류 활동을 할 수 있는 '어울림 센터'가 지어질 것이고, 스마트팜 및 스마트팜 교육장도 구상 중이다.
그리고, 김용자 이장 마음속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있다. 바로 '돌봄 센터'다.
얼마 전 혼자 사시던 어르신 한 분이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그럴 때면 김 이장이 상주를 맡곤 하는데, 이런 일은 여러 번 겪어도 마음이 익숙해지질 않는다.
"어르신들은 자꾸 돌아가시는데... 저는 마음이 급해요. 지금 제일 시급한 게 어르신들 돌봄 문제예요. 돌봄 센터가 당장 필요한데, 지자체에서는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마을에 90세 넘어 혼자 사시던 할머니 한 분은 경로당에서의 한 끼가 하루 식사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경로당에서 한 번에 많이 드시는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물 말은 밥이나 두유로 때우는 게 전부였다.
언젠가 마을에 수돗물이 안 나온 시기가 있었다. 경로당에도 단수가 되어 밥을 할 수 없었는데, 집집마다 물을 나눠주러 다니던 김 이장이 그 할머니 댁에 들렀다가 마당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해 기력이 없어 쓰러지신 거였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모시고 갔지만, 결국 입원한 지 열흘 만에 돌아가셨다.
"마을 경로당의 하루 한 끼는 어르신들이 하루를 더 사냐 못 사냐 하는, 살고 죽는 문제예요. 경로당 1인 1식 제공해 주는 사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시행하고 있는 군이 있긴 해요. 우리 군에는 아직 예산이 없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진행되는 농촌공간정비사업에서 '어르신 공동생활 홈' 구축이 가능하다고 해서, 사리면과 인접한 마을 임원들로 구성된 '주민협의회'에 제안해서 협의 중이다. '어르신 공동생활 홈'은 돌봄센터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당장의 공백을 채울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돌봄과 축제로 채워지는,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마을
김용자 이장의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고구마, 감자, 마늘, 양파, 고추, 쌀, 들깨, 참깨... 어지간한 작물은 조금씩이라도 농사를 짓는다. 4000평 정도 되는 소농이다. 주업은 농사지은 참깨 들깨로 기름을 짜서 판매하는 '영농조합법인 깨가 쏟아지는 마을'의 대표로, 제조-공장장-영업사원 역할까지 혼자 소화한다. 일주일은 농사, 일주일은 참기름 들기름 짜서 팔고, 일주일은 마을 업무, 나머지 일주일은 사회적 협동조합 활동하고... 그렇게 한 달이 채워진다.

▲(좌) 김 이장이 대표로 있는 '영농조합법인 깨가 쏟아지는 마을’ (우) 괴산에서 열린 문전성시 농부시장에 전시된 '깨가 쏟아지는 마을'의 제품들
좌)정소은, 우)김용자
"몇 년 전에 괴산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주민분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문전성시'라고, 저도 창립 멤버예요. 문전성시 이름은 제가 지었어요."
로컬푸드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괴산에서 농부시장 활동을 함께 했던 이들에게 제안해서 함께 만들었다. 그러다 조합원들과 '우리가 결국 먹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하면서 반찬가게도 만들었다. 이름은 '진수성찬'. 반찬과 도시락 판매, 밭으로 나가 먹거리 제공도 하고, 프로젝트를 의뢰받아서 하기도 한다. 지역에서 나는 좋은 재료만 쓰다 보니 아직까진 적자 운영이다.
문전성시에서는 작년부터 반찬 배달 사업을 시작했다. 독거 어르신, 그리고 어린이와 아빠만 사는 집이 주된 대상이다. 김 이장, 부녀회장 등 몇 명이 자원봉사로 주 1회씩 스무 집 정도에 배달을 하면, 그 집에선 며칠 분량의 반찬이 해결된다. 그러고 보니 김 이장의 활동을 관통하는 화두는 '돌봄'과 '섭생'이 아닐까 싶었다.
"저는 섭생이 어르신 돌봄의 기본이라고 봐요."
혹시라도 마을에 치매 어르신이 배회하시거나, 도시에 사는 자녀들과 연락이 안 되거나, 어르신 집에 TV가 고장 났다거나, 돌봄의 손이 필요할 땐 김 이장이 챙긴다. 이장 겸 돌봄 반장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어르신을 단지 돌봄의 손길을 요하는 수동적 존재만으로 보진 않는다.
"그냥 도움이 필요한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구성원, 동료라고 생각해요. 가령, 마을에서 하는 돌봄사업도 '어르신들과 함께 구상해서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고는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할머님이 사셨던 집 이야기를 꺼낸다.
"그분 사셨던 집이 참 예뻐요. 옛날에 잠실(蠶室)이었던 공간을 개조한, 모양이 길쭉한 집이에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그곳에서 어르신들 일자리 겸 동네 사랑방 겸해서 칼국숫집을 오픈해 보고 싶어요. 할머님들이랑 함께 국수 밀어서 팔아보면 재밌지 않을까요?"

▲김 이장이 꿈꾸는, 할머님들과 함께 운영하고픈 국숫집으로 점찍어둔 바로 그 집. 주민들이 함께 국수를 밀고, 문전성시를 이룰 손님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정소은
마침 그 집이 위치한 길 이름이 '사리로'란다. 그곳은 어떤 풍경일까 떠올려보려는데, 김 이장이 둘둘 말린 포스터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사리면'의 지명을 따서 국수를 테마로 한 "사리 면발축제". 왠지 이 마을과 국수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느껴진다.
"사리 면발축제"에서 최고의 인기 코너는 "사리 면발왕 선발대회"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 마을별로 재료비를 미리 지급하면, 각 마을 경로당에 모여 열띤 사전 연습이 펼쳐진다. 어르신들이 모여 반죽에 온갖 재료를 넣어보고, 밀어보고, 시식하며, 주민들과 품평회도 해본다.
"어르신들이 엄청 즐거워하셨어요. 작년에는 90세 넘은 할머님이 팥칼국수로 1등 하셨는데, 감격해서 막 우시더라고요."
기가 막힌 콘셉트의 축제인데 과연 보러 오는 이들이 많았는지 물었을 때, 김 이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골 주민들이 외지인을 방문객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발상은 지양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축제가 궁금해서 오는 이들을 환대하지만, 그들에게 선택받으려는 목적에서 뭔가를 도모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농촌의 생명력은 어디까지나 '자급자족'으로 유지되는 것이지, 외부(도시)에서 재원이 유입되어 연명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농촌이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도시는 그 착각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농촌은 외지인의 지갑이 열려야만 먹고살 수 있으리라는 착각.
"마을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해요.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을도, 지역 축제도, 모든 것들이. 이 생각엔 늘 변함없어요."
<제2회 사리 면발 축제>는 올해 11월 1일에 열린다. 괴산군에서는 사리면에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올해에는 그들을 염두해 베트남 쌀국수도 한 꼭지 넣어볼까 궁리 중이다.
"사리면엔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분들이 많아요. 쌀국수는 웬만하면 다들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증평에 쌀국수집 하는 베트남 분이 계시는데, 올해 축제 때 섭외해볼까 해요. 이주노동자분들도 축제에 와서 한 그릇씩 드시면서 같이 어울리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좌)<제1회 사리 면발 축제>포스터, (가운데)팥칼국수로 대상을 받은 신촌마을 주민 팀. 면발왕 선발대회에는 90세가 넘은 어르신도 참가하셨다.(의자에 앉아계신 분) (우)축제를 빛내준 '사리탑' 조형물. 자세히 보면 라면 업체에서 협찬받은 '사리면'이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다. 사리면에서 일명 '예술가'로 통하는 분이 직접 디자인하고 주민들이 함께 제작했다.
김용자
땅, 소유가 아닌 정주(定住)와 농사를 위한 것
깨가 쏟아지는 마을, 문전성시, 진수성찬, 그리고 사리 면발축제와 사리면발왕 선발대회까지... 이토록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넘치는 사람에게 걱정거리라는 게 있을까 싶어, 최근의 고민이 무언지 물었다.
"딱히 없는 것 같지만... 이장으로서 동네에 빈집들이 있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해요."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던 집을 물려받은 자녀들은 그곳에 내려와 살거나 팔지 않고, 가끔 별장처럼 쓰면서 비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긴 그러고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집은 어색한 풍경이다. 같은 맥락에서 농부가 농사짓지 않는 땅 역시 그렇다. 어색하고 황량하다. 아마도 생명력이 거세된 풍경이라서 그럴 것이다. 공간의, 땅의 주인으로서 정주(定住)하는 이가 없는 곳엔 생명력이 깃들지 못한다. 그래서, 살거나 가꾸지 않으면서 '소유'만 한다는 건 좀 이상하다. 주변의 생명력을, 공동체의 활력을 잠식한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이 그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리면 주민들이 산업단지 백지화 투쟁에서 이긴 비결에는 마을의 '똥 냄새'가 '본의 아니게' 활약을 했다. 이 땅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 어떻게 되어도 개의치 않을, 마을의 역사와 맥락을 함께 하지 않은 외지인이 땅을 '구입'해 함부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천만다행히도 똥 냄새가 본의 아니게 수호자 역할을 했다.
그간 주민들의 아침잠을 깨워준 똥 냄새는 이제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사라진다. 자본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산단 반대운동을 계기로 국수 면발처럼 촘촘히 얽혀버린 마을 주민들의 방어막을 다시 뚫는 건 이젠 어려워진 것 같다.
[필자 소개] 정소은: 독립기획자로 최근 몇 년간 주로 노동/장애/환경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지금은 자신의 쓰임새를 새로이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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