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1 06:54최종 업데이트 25.04.01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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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3월 27일 일반 헌법소원 사건 선고를 위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있다.연합뉴스

어쩔 수 없이 암담한 나날이다. 누가 보더라도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탄핵 심판을 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선고를 미루고 있는 헌재를 보면서 차분히 결정을 기다리려던 마음들도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산을 통째로 뒤덮은 시뻘건 불기둥이 훨훨 타오르는데, 양동이 하나만 들고 발만 동동 구르는 심정이랄까. 결국 터 잡고 살던 집과 마을을 새까맣게 다 태우고 재와 생채기만 남긴 지난 며칠간의 대형 산불이 한 편의 예고편인 듯 헌재의 기능 정지와 국가 존망에 대한 거친 말들이 온라인상에서 쏟아져 나온다.

해외에서 거론했던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은 해외에서만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졌다. 국회가 윤석열의 계엄 선포를 불과 몇 시간 만에 해제시키고, 끝내 윤석열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킬 때 이제 헌법재판소에 결정을 맡기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 사회가 헌법에 기초한 질서 안에 있다고 믿은 만큼 윤석열 세력은 반드시 단죄될 것이라는 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후 우리가 마주한 것은 회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다시 돌아갈 곳을 잃은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많은 일이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공통의 규범과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밖에서 벌어졌다.

대통령 권한대행(들)은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거나 선택적으로 임명했다. 헌재가 위헌이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피의자 윤석열의 내란 행위에 대한 특검 수사도 거부했다. 군대와 국정원, 소방청 등을 동원해 헌법 기관을 장악하고 정치인과 언론사 등 적대세력을 제거하려 했던 행위 등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검찰총장은 피의자 윤석열에 대해서만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항고를 포기하면서, 검찰 스스로 내란의 우두머리라고 한 자를 풀어주었다. 대통령 경호처는 물리력을 동원해 대통령에 대한 법 집행을 막았다. 한때는 국제사회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던 국가인권위는 대통령의 내란 행위가 초래한 인권 침해가 아니라 윤석열만의 인권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자초했다. 급기야 헌법재판소는 윤석열의 중대한 위헌적 행위에 대해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 사안의 성격은 좌우의 문제도, 진보 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헌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의 이러한 행태는, 윤석열의 계엄령을 옹호하며 길거리의 폭력과 혐오에 올라탄 집권 여당의 행태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헌법과 법률에 의해 공적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기관은 당연히 헌법에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도 다르지 않다.

고장 난 국가기관 수리해야 할 이유도 분명해져

윤석열 대통령이 2월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서 최후 진술을 하고 있다.헌법재판소 제공

우리는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정치적 격변에 직면했고 그 터널을 지나왔다. 또다시 사태가 발생해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놓은 적이 없다. '헌법'이라는 사회질서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가이드가 존재하고, 헌법재판을 통해 혼란을 제거하는 기능이 무리 없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껏 우리는 헌법과 헌법재판에 각종 사안의 정당함과 부당함에 대한 판단을 기대어왔다. 그래서 온 국민이 지켜보았던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시도에 대해 헌재가 파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 보내기가 이어진다면, 그건 헌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헌재의 시간이 다해가는 지금 차병직 변호사의 <헌법의 탄생>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저자는 주요 국가들의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각국의 역사를 그물망처럼 훑으면서, 근대 국가 내에서 통합적이고 통일적인 규범으로 역할하고 있는 헌법이 시간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헌법 준수 의무자는 개개인이 아니라 국가기관임을 분명히 한다. 더불어 "성숙한 헌법적 관행은 헌법 규정의 자구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 행위를 통해 거듭 확인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헌법은 한참 위기상태에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헌법을 준수함으로써 헌법에 기초한 질서를 이끌어야 할 국가기관의 반헌법적 행태가 계속되고 있고, 헌법재판관의 성향이나 구성 그리고 임명 시기 등을 둘러싼 논란만 거세지고 있다. 헌법재판의 정치화는, 당연하고도 명백하게 도달해야 할 윤석열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상징이자 실체인 헌법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이기도 하다.

답답한 탄핵 국면에서 그나마 얻은 소득이라면, 윤석열 파면이나 처벌과는 별개로 고장난 국가기관을 수리해야 할 이유들도 분명해진 것이다. 집을 지탱하는 주축들에 흠결이 생겼다면 설계도부터 다시 손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이나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의 임명을 자의적으로 한다면, 그 임명 권한을 회수하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 헌재가 이번에 헌법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도 헌재가 아닌 국민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헌재의 시간은 사실상 끝났다. 그 끝이 파국이 아니려면, 이제라도 헌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윤석열에 대한 즉각적인 파면 결정뿐이다.

박정은 /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박정은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박정은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2000년부터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평화군축, 국제연대 활동에서부터 정치개혁, 검찰개혁 활동, 사회정책 관련 연대 활동 등에 주력했습니다. 2018년부터 4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직을 맡았고, 정치개혁공동행동 집행위원장,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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