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6 09:51최종 업데이트 25.03.2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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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 로비에서 관람객이 오가고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광복 80주년 3·1절을 맞아 재개관했다.연합뉴스

안중근의 날들은 여기저기에 가려져 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쓰러트린 10월 26일은 박정희 기일에 가려져 있다.

1909년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과의 대결인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세계적인 제국주의 강대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오키나와와 대만에 이어 대한제국을 침탈하던 시절에 일제의 세계 침략 노선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1909년 10·26 하얼빈 의거다. 그렇지만 이 날짜는 1979년 10·26 사태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세계적 제국주의 국가의 거두를 쓰러트린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이 날짜 역시 충분히 부각되지 않고 있다. 3월 26일은 독재자 이승만의 생일로 훨씬 많이 기억된다.

지금도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세력은 그날을 이승만 생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일은 1949~1960년에는 훨씬 많았다. 그 12년간에는 그날이 사실상의 국경일이었다. 민간과 정부가 이승만 생일을 축하한다며 그날은 물론이고 한 달 전부터 분주했다. 이 때문에도 안중근의 순국일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승만의 생일과 겹친 안중근 순국일

온 나라가 이승만 우상화에 동원됐던 그 12년간의 3월 26일에 조용히 안중근을 추모하는 이들이 있었다. 1949년 3월 23일 자 <경향신문>은 서울 명동의 극장에서 열릴 행사와 관련해 "고 안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는 오는 26일 오후 1시부터 시내 시공관에서 추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안중근 순국일 추모는 종교 의식으로도 거행됐다. 3선 개헌(사사오입 개헌) 이듬해여서 이승만의 권력이 절정에 오르던 때인 1955년에는 가톨릭 신부들이 순국일 이틀 뒤에 추모미사를 열었다. 그해 3월 29일 자 <조선일보>는 이 미사가 월요일인 3월 28일 거행됐다고 전했다. 이듬해인 1956년 3월 26일 월요일에는 서울 중구 약현성당에서 추모미사가 열렸다.

이승만 우상화가 진행된 제1공화국 때는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훈장을 수여하는 일이 극히 제한됐다. 이 12년간에 그런 지정을 받은 한국인은 딱 둘이다.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3집(2021년)에 실린 이성우 충남대 강사의 논문 '독립유공자 서훈의 역사와 제도화 추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1949년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내국인에 대한 서훈은 하지 않았다.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를 비롯한 외국인 16명이 서훈되는 정도였다."

1949년 당시의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은 훈장 기타 영예를 수여한다"고 규정했다.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뒤 이승만에게 수여된 훈장은 그 스스로가 수여하는 셀프 훈장이었다. 부통령제가 없었다면 이시영에게는 수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하는 독재자 대통령의 치하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독재자 대통령의 생일에 안중근 기일을 추모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안중근기념사업회와 더불어 가톨릭 신부들의 추모는 가치 있는 일이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쏜 직후에 가톨릭 내에서는 이를 부끄러워 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역사문화연구> 제41집(2012년)에 수록된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 '한국 가톨릭계의 안중근 기념사업 전개와 그 의미'는 "뮈텔 주교를 필두로 한 한국 가톨릭계 교단의 주류 세력은 안중근 의거를 살인행위로 규정하였다"라고 한 뒤 "국권 회복 이전의 한국 가톨릭계는 부정적인 안중근 인식이 강하였다"라고 말한다.

프랑스 선교사인 귀스타브 뮈텔은 조선교구장이었다. 한국 가톨릭 지도자인 그는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평신도 자격을 박탈했다. 안중근을 문제적 인물로 격하시켜 제명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승만 생일 대신 안중근 기일을 기리는 용감한 신부들이 있었던 시절에도 대체적으로 유지됐다. "가톨릭계는 1970년대까지 노기남 대주교가 안중근 추도미사를 거행하기도 하였으나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라고 위 논문은 알려준다. 현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안중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일면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려주는 서술이다.

안중근을 복권시킨 김수환 추기경

1993년 8월 21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 교리신학원 강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이 한국 천주교 사상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후 83년만에 가톨릭 신도로 공식 복권됐다. 연합뉴스

안중근 거사 당시에 지구상에서 최대의 악은 제국주의였다. 제국주의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소수 독점자본가의 탐욕을 위해 파괴했다. 그래서 일본제국주의의 거두를 쓰러트린 일은 지구적 차원의 의거였다. 하지만, 가톨릭 지도자들은 그런 관점이 아닌 일제의 관점에서 안중근을 바라봤다.

이승만 잔칫날에 안중근 기일을 기억한 신부들은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안중근을 공정하게 해석한 성직자들이다. 이들의 신념과 용기는 1993년에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을 재평가하는 단계로 한국 사회와 교단을 전진시켰다. 그해 8월 22일 자 <한겨레>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은 전날 열린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에서 "안 의사의 행동은 조국과 민족의 방어를 위한 의거로서 단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며 안중근의 평신도 자격을 회복시켰다.

진일보한 조치는 2010년에 염수정 추기경에게서도 나왔다. 위 신운용 논문에 따르면, 염수정 추기경은 그해 6월 10일 제10회 가톨릭포럼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으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말자"라고 한 뒤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시복(諡福)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천명했다.

안중근을 성인 아래인 복자(福者) 지위로 올리기 위한 이 노력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렇지만, 가톨릭이 반제국주의 열혈투사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인물'로 평가했다는 점은 의미 있다. 항일투쟁이 신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었다.

안중근 가족이 서학으로 불리는 천주교로 개종하고 그가 도마(토마스)라는 영세명을 받은 해는 16세 때인 1895년이다.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민병대를 조직해 동학혁명군을 공격한 이듬해였다.

동학은 반외세·반봉건을 내걸었다. 안중근은 동학의 반외세 구호에는 동의했지만 나머지 하나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학에 총을 들었던 그가 바로 이듬해에 서학 신자가 됐다. 동학군으로부터 빼앗은 노획물을 차지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스 신부가 성당에 숨겨준 일이 직접적 계기가 됐지만, 동학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으리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떤 동기로 입교했든,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가 되고 나서 14년 뒤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세계사적 의거를 성사시켰다. 세상의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를 실천했다.

오랫동안 안중근을 터부시했던 가톨릭이 1990년대 이후로 조금씩 마음을 열어온 것은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좀 더 자세히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1909년 10월 26일의 총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

그 의거가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 경종을 울리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는 측면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충분히 공유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반쪽짜리"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3월 26일과 10월 26일에 가려진 안중근 의거의 참뜻을 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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