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6 10:54최종 업데이트 25.03.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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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사태를 거치면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파괴하려는 집단과 그것을 옹호하는 일부 종교 세력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픈 종교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의 내적 체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제도화된 종교를 뜻한다.

최근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이를 바탕으로 2024년에 제작된 같은 제목의 영화도 종교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가톨릭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여성 착취를 이해하려면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이 뿌리내린 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의를 외면할 수 없었던 평범한 노동자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주)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5세기경에 기독교가 전래한 지역 중 하나다. 12세기부터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하였고, 16세기에 세워진 영국 성공회(개신교)를 따르지 않는 가톨릭 신자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런 차별은 1829년 가톨릭 해방령(Catholic Emancipation Act) 발표 때까지 이어졌다. 이때까지는 탄압받는 가톨릭이 반(反)식민 운동과 결합했다. 19세기 후반부터 가톨릭교회는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아일랜드 독립 후에는 정치권과 결탁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점차 종교적 권위주의가 강화되고 부작용이 발생한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아일랜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는 대표작인 <율리시스>에서 이점을 조명한다. <율리시스>에서 젊은 작가 지망생 스티븐 디덜러스는 자신을 억압하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영국 식민주의와 가톨릭교회를 꼽으면서, 이들이 지배하는 역사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역사는 내가 깨어나려고 애쓰는 악몽이다."


영화 <사소한 것들>은 여전히 가톨릭이 강력한 사회적 힘을 행사하는 1980년대 중반 아일랜드 남동부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 웩스퍼드(Wexford)를 배경으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삶 뒤에 감춰진, 종교와 얽힌 추한 면모를 드러낸다. 작가가 원작 후기에서 밝히듯이, 영화는 아일랜드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룬다.

"1996년에야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게 잡으면 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입니다. 막달레나 세탁소의 기록은 대부분 파기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접근 불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일한 여자와 아이들 가운데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거나 노역을 인정받은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여자가 아기를 잃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시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습니다."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다산책방

원작 소설과 영화는 "파기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접근 불가능"한 기록을 대신해서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 진실을 드러내려 한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허구로서 소설이나 영화는 끔찍한 사태 자체의 기록보다는 그런 사태와 상황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미친 영향과 반응(reaction)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평범한 노동자이다. 그는 수녀원을 비롯한 동네 사람에게 석탄을 공급하는 석탄 상인이자 노동자이다.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의 빌과 어린 시절 빌의 모습을 병치하며 전개된다. 현재의 빌은 남편과 딸을 가장 우선시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둔, 언뜻 보기에는 화목한 가장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크리스마스 시즌은 그 점을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빌이 운전하는 트럭의 덜컹거리는 소음과 석탄을 어깨에 메고 배달해야 하는 고된 육체노동은 그가 꾸려야 하는 삶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해야 하고, 딸들은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이렇게 수녀원은 빌에게 생계와 교육을 뒷받침해 주는 기반이 된다. 역으로 말하면 수녀원은 빌의 삶을 통제한다. 빌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수녀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은 석탄 창고에 감금된 것으로 보이는 소녀 사라를 만난다. 소녀는 임신 중이다. 도와 달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면서 소녀를 수녀들에게 데려간다. 이때부터 빌의 내면에서는 큰 동요가 일어난다. 빌이 뻔뻔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무감한 사람이었다면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말하듯이 빌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그가 목격한 소녀의 고통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빌이 석탄으로 더럽혀진 손을 계속 씻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영화도 그런 강박적인 행동을 세심하게 비춘다. 당연히 이런 행위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음에서 소녀의 모습을 지우고 흘려보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는 지워지지 않는다. 소녀를 수녀원에 맡기고 난 뒤 다시 찾아간 빌은 소녀에게 이름을 묻고 말한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라."

빌은 힘없는 노동자이다. 그가 점차 거리를 두는 수녀원은 지역 곳곳에 입김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조직이다. 온화함을 찾기 힘든 수녀들, 특히 수녀원장(에밀리 왓슨)의 모습은 나쁜 의미로 제도화되면서 권력이 된 종교의 모습을 표현한다. 빌과 사라의 관계를 눈치챈 수녀원장은 빌에게 은근한 압박과 회유를 하며, 눈을 감으라는 뜻으로 돈을 준다.

지금, 내란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주)

빌은 영웅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용기와 감수성을 지녔다. 이 영화에서 감흥을 받는 지점이다. 영화는 빌의 시점에서 마을 주민들을 조명하는데, 동네 사람은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애써 외면하거나 함구한다. 수녀원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다. 빌은 다르다. 빌이 소녀를 구출해 집으로 돌아올 때 두 사람은 마을을 천천히 걸어서 통과한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시선을 알면서도 꿋꿋이 나아간다.

빌이 내린 외롭지만, 용기 있는 선택이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배경에는 영화가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빌의 어린 시절 경험이 작용한다. 빌은 어린 시절 윌슨 부인 집에서 자랐다. 윌슨 부인은 갈 곳 없는 빌의 어머니와 빌을 거두고 도왔다. 윌슨 부인 덕분에 빌은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곳에서 빌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환대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영화에서 관객은 사랑받은 존재가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는 진실을 확인한다.

영화에서는 대사가 없게 처리되지만, 원작의 이런 결말은 인상적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용기를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걸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내가 최근 읽은 국내외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결말이다. <사소한 것들>을 읽거나 보면서 권력화된 종교의 모습을 확인하고, 지금 일부 종교 세력이 보여주는 황당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종종 무기력감을 느끼는 힘든 상황에서 약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나는, 그리고 아마도 다수 시민은 심한 무기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가끔은 희망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종종 묻게 된다. 빌과 같은 평범한 시민, 노동자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빌의 마음을 전하는 묘사에서 힘을 얻는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성심껏 하는 것이리라. 그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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