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9 17:56최종 업데이트 25.03.2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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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16. 전란으로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NARA/박도

한국전쟁이란 역사에서, 교훈 운운하기 전에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일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서 죽거나 죽어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자신이 고통과 고생과 공포에 싸여 그 시간을 살아냈으니. 이런 세대에게 교훈이란 말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 나가는 전쟁통을 겪었으니 어떤 공론을 내밀 수 있을까.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전쟁이 끝나고 7년 후에 태어났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이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배운 게 국민학교 3학년이 아니었나 싶다. 전쟁이란 말이 내 귀로 들어와 머릿속에 새겨지기 시작했으니 전후 한 세대가 완전히 흐른 다음이었다.


남파간첩, 무장공비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오제도 검사가 나오는 반공 드라마를 어린 마음에 숨죽이며 들었다. 대낮에 담요로 창문을 가려 깜깜한 방에서 뭔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여 엄마 옆에 꼭 붙어 앉아있던 민방위 훈련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보고 듣고 배워서 알게 된 한국전쟁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그놈 나쁜 놈'이었다. 공포와 분노가 응축된 반공이었다. 내가 대학을 가고 성인이 되고 어설프게나마 세상을 바라보면서 박정희를 반대하는 쪽으로 훅 기울었지만 어려서부터 축적된 공포와 반공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의식의 깊은 곳에 진득하게 남아 있다.

그랬던 내가 60년을 채워가는 2020년, 시기와 우연이 맞아 휴전선 일대를 답사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한국전쟁을 수십 권의 책으로 읽고 여행기를 풀어쓴 게 또 3년이다. 지금도 나의 한국전쟁 소감은 그대로일까. 그대로인 것도 있고 달리 보이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이든 대부분은 그 전에 인지하지 못하던 것이 더 보이게 된 것들이다.

한국전쟁에서 얻은 교훈

1952. 10. 8. 철원, 백마고지 전투에서 부상당한 국군NARA/박도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에서 내가 읽어 내게 주는 교훈은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적대적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절멸시킬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침 전면전을 시작해 쾌속으로 남진했다. 낙동강에서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될 것 같았지만 결과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미군은 인민군의 허리를 잘라버리고는 남으론 소탕하고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경주하듯이 옆구리를 노출한 채 빠르게 북진했다. 그러나 북한을 전부 점령하기 직전에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 쾌속북진보다 더 빠른 패닉후퇴로 주저앉고 말았다. 유엔군으로 포장한 미군의 세계최강 군사력 역시 북한과 인민군을 절멸시키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덩치가 크다고는 해도 건국 3년이 되지도 않은 신생국가 신중국은 무서운 기세로 미군을 몰아쳤으나 그들의 역량 역시 37도 선에 다다르지 못하고 38선 부근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북한과 미국에 비해 영특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군에 패하고도 계속해서 핵으로 위협을 했으나 더 이상 확전할 수도 없었다. 소련이 이미 핵보유국으로 올라섰고 재래식 전투로는 피해가 너무 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팽팽한 설전과 치열한 전투를 2년이나 더하고도 전선에 큰 변화 없이 거의 그 자리에서 정전협정을 마지못해 체결했다.

적이라 해도 상대방을 어느 정도 누를 수는 있지만 솟아나는 욕심과 끓어오르는 분노만큼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는 없다. 한반도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남한 북한으로 나뉘어 내전으로 시작했지만, 미국과 소련 중국이 강력하게 후원하고 참전하는 국제전 내지 진영의 전쟁이 된 다음에는 더더욱 그렇다.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 없다는 '현실'이다. 기억해야 한다, 어느 정도 우세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절멸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또 하나의 교훈은 그 '나쁜 놈' 논리다. 내가 어려서 숱하게 들었던 '그놈 나쁜 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나쁜 놈에 가려진 다른 나쁜 놈들도 기억해야 한다. 나쁜 그놈은 김일성이라는 이름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 김일성의 죄업은 전면전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중국과 소련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다.

인간 세상에 항상 갈등이 있다. 말로 싸우면 말싸움이다. 돌을 던지면 돌싸움이고, 국지전이면 국지전이다. 전면전이란 지옥의 더 큰 문을 자신만만하게 활짝 열어젖히니 그 이후의 모든 것은 극단적인 전면전이 되고 말았다. 전장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후방에서는 광기의 학살이, 공중에서는 악마의 폭격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하나하나 발라내 평가하면 각각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으나 그것들을 종합하면 전면전을 개전한 김일성에 가장 큰 첫 번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길 위에서 읽은 한국전쟁의 교훈과 성찰은 '김일성 나쁜 놈'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평가와 단죄만으로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꾸려갈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이든 그 후예들이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안의 변수가 아니란 현실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항상 우리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닌, 독립변수였다.

집에 떼강도가 들어 집안이 박살 나고 재물을 탈취당했지만 이웃의 도움으로 물리친 상황이라고 해보자. 누가 범인인지 확인하고 고발하는 것 이외에 내가 제대로 했어야 할 일은 무엇이었는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왜 담장이 허술했을까에서 시작해 강도를 당한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그렇게 당하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날이 밝았는데도 '저놈 강도야'만을 외치고 있는 것은 대책의 반도 되지 않는다.

전면전 개전의 죄업을 포괄적으로 김일성에게 묻는다면, 남침에 대비해 공고한 국방력을 구축하지 못한 포괄적인 책임은 이승만에게 물어야 한다. 그는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로서 김일성의 남침을 막았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구호는 북진통일이었다. 그러나 북진은커녕 남침 전면전을 방어하는 데에도 너무 무력했다. 그럴만한 병력과 무기, 교육훈련 등을 책임지고 준비했어야 한다.

만일 그게 불가능했다면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남침 전면전을 막았어야 한다. 미국의 신뢰를 얻든, 협박하거나 속이든, 어떤 방법을 쓰든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더 강하게 키웠어야 한다. 다른 면으로는 김일성을 만나 설득을 하든, 저우언라이를 만나 견제를 하든, 그들을 속이든 달래든 무엇이든 했어야 한다.

그는 나름 무엇을 하기는 했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견제하고 막아내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가 미군을 불러온 것에서 성공한 것 같지만 이것 역시 큰 오해다. 그것은 이승만이 해낸 게 아니라 미국이 필요해서 재빠르게 참전한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가장 크게 성찰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승만 휘하의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총참모장과 그 휘하에 있던 각급 사단장 등도 마찬가지다. 전선에서 보자면 자기 방어지역에서 3일간이나 인민군 공세를 막아낸 6사단장 김종오에 비견해 추풍낙엽밖에 되지 못했던 백선엽을 비롯한 다른 사단장들 역시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의 인천상륙작전을 세계 전쟁사에서도 빛나는 성공으로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이어 야심만만하게 시도한 원산상륙작전이 완벽하게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북진공세를 주저앉혔다. 그뿐 아니라 승자의 오만에 빠져서는 중국군 참전에 대해서 치명적인 오판을 했다.

그 결과는 최전방의 유엔군과 국군을 중국군이 파놓은 함정에 먹잇감으로 몰아넣었다. 압록강에서 시작된 1.4후퇴는 맥아더의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패배이자 죄과였다.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전쟁

이런 뜻에서 이 글에서는 '그놈 나쁜 놈'의 서사를 근간에 두고 있지만 성찰로 되새길 대목에 더 집중했다. 역사에서 배운다면 나쁜 놈 서사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나와 우리를 성찰하는 것으로 귀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놈 나쁜 놈만 외치며 죽여 없애자는 극단적인 대결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에게서 보게 된다. 비약이지만 한국전쟁의 전면전은 지금 2024년~2025년 대한민국에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한의 남침을 가리키며 반공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세지만 그것을 독재 권력을 구축하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그것도 사람을 죽여 가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반대자를 죽여 없애면 독재권력이 온전할 것 같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죽이니 죽어 없어진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뭉쳐서 독재 권력을 무너뜨렸다.

이승만은 하야라는 이름으로 탄핵돼 늙은 망명객이 됐고, 박정희는 반독재의 폭발적인 압력에 밀린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 전두환·노태우 역시 북한을 손쉬운 핑계로 자신들이 스스로 안보를 허물어가며 전선의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탈취했다. 이런 권력이 국민에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전면적으로 국민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그 죗값으로 퇴임 후에 감옥으로 가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이명박도 퇴임 후에 감옥으로 들어갔고, 박근혜는 임기조차 채우지 못한 채 감옥으로 갔다. 심지어 현직 대통령 윤석열은 임기 중에 체포돼 형사피의자로 구치소에 들어가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것들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의 하나가 바로 이견을 용인하지 않는 극단적인 대결이다. 사람 사는 일이란 0에서 10까지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3에서 7 또는 4에서 6 사이에서 찬성하고 반대하고,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다. 그 진폭을 늘이고 늘여서 전면전의 논리로 빠지면 중대한 착오에 빠진다.

1에서 9는 사라지고, 0과 10 두 가지 배타적인 선택지를 스스로에게 강요하다가 최악의 결과가 되고 만다. 국토완정과 북진통일이란 망상에 빠져 아주 나쁜 결과를 낳은 한국전쟁에서,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최후 또는 퇴임 후에서, 심지어 현직 대통령의 어이없는 계엄령에서 두 눈으로 목도하고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지 아니한가.

한반도 패권을 둘러싼 김일성과 이승만의 극단적인 대결은 결국 반쪽짜리 두 개의 한국에서, 사람은 수없이 죽었고 재화는 깡그리 파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남북의 권력은 남북 전면전을 핑계로 자기 권력을 위해 내부에서 또 다른 전면전을 벌였다. 북한은 자신들의 인민에게 전면적인 압승을 거두어 3대 세습이라는 기괴한 병영국가를 만들었다. 남한에서도 완벽한 독재를 구축하기 위해 국민들을 상대로 전면적인 탄압으로 일관했으나 국민의 반독재 반격으로 독재권력이 격추되지 않았는가. 그런 와중에 남남갈등이 또 다른 전면적인 대결로 치달으며 발생한 계엄 내란 사건을 2024, 2025년에 겪은 것이다.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숨막히는 긴장 속에 계속되고 있다.



답사여행을 다니고 글로 정리하면서 이보다 더 많은 것들을 쓰고 독자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역량이 너무 얕아 아쉬움을 남기고 글을 마친다. 독자 여러분들이 여분의 상상을 발휘해 보라는 뜻에서 내가 쓰지 못한 항목들을 기억해 본다.

전쟁 전의 사정에서는 38선에서 벌어진 국지전을 살펴보고자 했었다. 전쟁 중의 일로는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찾아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내게는 너무 과중한 주제였다. 지리산에 작은 거점도 하나 만들고 빨치산의 현장을 찾아보았으나 더 이상 나가진 못했다. 서해 5도의 비정규전과 을지부대 역시 관심은 많았으나 글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각 나라의 사정도 일부는 찾아보았으나 더 이상 진행하진 못했다.

전쟁이 남긴 것들에서 쓰지 못한 게 가장 많았다. '끊어진 것'들에 주로 시선이 닿았었다. 휴전협정으로는 남북 공유의 중립수역이지만, 현실로는 끊어진 금지수면 한강하구, 끊어진 길의 하나로 금강산 가는 길,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끊어진 수복지구의 마을들, 미군기지에 길이 끊어진 동두천시 걸산동 오지 마을, 온당한 행정은 끊어진 채 지뢰를 밟아가며 농지를 개척했던 대마리 이야기 등이다. 끊어진 선을 넘나들던 간첩은 넘나들지 않은 조작 간첩까지 간첩시대를 그려내기도 했다.

전쟁의 영웅이라는 논제에서 과연 누가 영웅인지를 쓰고 싶었으나 이 역시 나의 역량으로는 담아내질 못했다. 전쟁이 남긴 파괴된 가족들, 고아·과부·홀아비 그리고 상이군인도 생각만 하고 말았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삼국으로 가버린 포로, 이와는 결이 다르게 타이완으로 가버린 중국군 포로들의 훗날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국내에 남았으나 전향서 한 장을 쓰지 못한 비전향 장기수들도 그렇다. 해외로도 관심은 갔었다. 북한의 전후복구에 참여한 독일인의 기록과 <냉전의 마녀들> 보면서 호기심을 냈으나 내가 범접할 범위는 아니었다.

재일교포가 전쟁과 함께 분열됐던 것은 누구나 잘 안다. 재일교포 간첩 사건도 많았고 그만큼 조작사건도 많았으니.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의 조선학교는 내가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것에 놀랐다. 방문뿐 아니라 그 관계자들을 만날 수 없다. 재일교포가 많고 역사의 흔적이 많은 오사카든 다른 지역이든, 우연히 만난 사람이 조총련 소속이라면 귀국 후에 바로 정부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났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고해야 한다. 그가 요양병원에 가는 길이었던 노인이라도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끊어진 노래로 <임진강>도 잊을 수 없다. 북한의 노래가 조총련을 거쳐 일본의 대중가수와 영화 그리고 NHK 방송을 타고 다시 남한으로 건너온 노래다. 이 노래의 가느다란 역사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했으나 쓰질 못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노래를 쉽게 찾아서 들어볼 수 있다. 내가 가장 많이 되풀이 해서 들었던 것은 젊은 가수 이랑의 뮤직비디오다. 유튜브에서 <이랑 イ・ラン - 임진강 イムジン河>으로 찾을 수 있다. 영상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생각은 했으나 하지 못한 것들에 아쉬움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는 고향나라의 모든 문제들이 어찌 보면 한국전쟁이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나 같은 여행객이 더이상 욕심 낼 글감은 아니다.



이렇게 기가 막히고 힘들었던 시대를 읽었으니 글을 마무리하는 마음이 경쾌할 수는 없다. 연재 글을 마무리하는 지난해 12월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의 모처에서 열흘 정도 글감옥을 자처했었다. 글을 마치고 귀가하기 전날 해질 무렵 거진항 등대가 있는 바닷가 야산의 오솔길을 걸었다. 연재 글을 마무리하고는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젖어 들었다. 눈물은 아마 추워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한국전쟁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팝송 하나가 들려왔다. "Linger on your pale blue eyes(당신의 옅은 푸른 눈이 떠오르다)..." 내 눈에 죽은 사람의 군집이 떠올랐고 어른거렸다.

전쟁에서 죽은 사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한 사람마다 한가지씩의 절절한 사연을 갖고 죽었을 것이다. 살아남아 긴 세월이 흘렀으면 씁쓸해도 추억이란 말로 눙쳤을지도 모를 사연들. 그 많은 죽은 자들을 향해, 크지만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큰절을 올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이를 두고 상주에게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하지만 죽은 이에게 무슨 복이 있으랴. 이미 육신은 흙이 되었고 누군가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들도 사그라들었을 판에 한낱 여행객이 복을 빌어 무엇하랴. 그래도 복이라도 빌어야 내 마음이 떠돌지 않을 것 같아 마음속으로 빌었다. 오늘 글을 마치면서 다시 큰절을 하면서 그분들의 복을 빌어드린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길 위에서 읽고 느끼고 이야기를 나눈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한낱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이런 글을 마무리까지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고마운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길에는 동반자가 있었지만 글을 풀어가는 동안에 글의 선생이자 동반자가 있었다. 이런 면에서 나의 오랜 친구 김동진에게 크게 감사해야 한다. 그는 기꺼이 나의 난삽한 글을 다듬어주는 글쓰기 선생이 돼줬다.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글조차 다듬어주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나 글 속에서 과하게 흥분하는 나를 적절하게 진정시켜 준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공이 아닐 수 없다.

철원 평야를 조망하는 소이산 전망대.윤태옥

가장 크게 고마운 그룹은 나의 답사여행을 함께 해준 길 위의 동반자들이다. 30여 차례의 답사여행은 전부 동반자들이 함께했다.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상법이나 보는 각도가 조금씩 달랐거나 때론 상반되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스스럼없이 나누어 나의 좁은 소견을 넓혀 주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고마운 동반자는 베이징의 친구 이경석이다. '남해 서해 그 다음은?'이라는 짧은 질문으로 휴전선 일대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첫 번째 휴전선 답사는 물론 계절과 답사지를 바꿔 가며 네 번이나 함께했다.

휴전선 첫번째 답사윤태옥

통신사 연행사 등의 역사기록의 전문가인 신춘호 박사는 길 위의 선생님으로 큰 도움을 줬다. 38선 답사에서 손수 운전대를 잡아 도움을 준 오랜 친구 손정욱 단장, 나의 여행 동지인 오성찬·김현수·김혜정 세 분도, 김영미·조현두 두 분도 두 번 또는 그 이상 동반해 주었다.

구례의 시인 조경숙님은 남도 지역의 답사에 차를 내어주거나 동행도 해주면서 도움을 줬다. 그리고 내 답사여정과 풀어쓰는 글들을 지켜보면서 응원과 격려를 해주곤 했다. 시인의 짧은 말은 종종 시처럼 다가오기도 해서 큰 힘이 됐다.

선친의 고달픈 월남 행적의 현장을 찾아보고 싶어서 초면임에도 동반을 청해준 작은 역사학자 남명애님은 특별한 동반자이다. 답사를 함께 다녔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정리한 선친 남두용의 일대기를 이 글에 실을 수 있게 해줬다.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전체 글을 검토해준 노고는 말로만 고맙다고 할 일은 아니다.

외국인 학자들도 동반한 적이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관한 학술 포럼에 참여했던 외국인 학자들에게 한국전쟁이란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다는 김인희 박사의 요청을 받아 함께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유엔군 화장터와 영국군 유적지에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들도 내게는 특별한 기억이다.

그리고 일일이 거론하지는 못해 동반자 명단으로 감사한 마음을 기록해 둘 동반자들이 많다. 강미정·강창구·구미애·권순용·김옥인·김주영·김진이·김현종·김혜정·김화심·노승종·민병래·박영운·박종호·변소영·성단근·신철경·안광석·안철희·안혜숙·양정윤·오윤숙·오재완·원혜연·윤은선·윤재욱·윤지원·이근희·이미덕·이민·이순석·이현숙 ·이호근·이화자·이희승·전영순·정지철·정현환·조용주·조현두·주한규·차성호·최지언· 탁상오·한기철. 길 위의 시간을 함께 하고 같은 생각 다른 생각을 가리지 않고 나눠주었다. 답사 경비도 분담하고 나를 격려해줬다. 고마운 일이다.

답사여행의 동반자는 아니지만 길에서 만난 고마운 분들도 많다. 정창수 양구군의회 의장은 그 지역의 전쟁사와 북으로 간 선생님 이야기를 제공해줬다. 정춘근 시인은 이태준과 철원지역을 연구하면서 대마리 이야기를 시집으로 냈다. 내가 수소문해서 찾아갔을 때 기꺼이 독선생은 물론 길 안내까지 해주었다.

ROTC중앙회의 김준철님은 답사지에 관한 정보에서도 도움말을 주었고 포천의 답사현장에서는 직접 와서 현장을 안내해 주면서 촌지까지 쥐어주었다. 내가 답삿길에서 받은 유일한 촌지의 고마움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촌지를 전해준 김준철님.윤태옥

38선 답삿길에 들르면 관련 자료는 물론 맛집까지 맛보게 해준 원미경 도서출판 산택 대표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그는 출판으로 치면 작고 작은 도시인 고향 춘천에서 춘천의 출판사로 지역사를 발굴하고 출판하는 우리나라에서 꽤나 귀한 출판인이다.

글과 길에 동반자가 있다면 연재가 실린 매체에는 독자들이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면서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관계의 오류를 지적한 댓글 이외에는 답을 달지 않았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적지 않은 댓글이 의견교환의 차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게으름을 가리려는 얕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부족한 내 글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댓글을 달아준 분들에게 필자의 무대응이란 무례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길 위에서 읽는 답사여행은 전후로 문헌에서 얻는 지식과 정보가 아주 중요하다. 몇몇 분에게는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실어두려고 한다.

답사여행을 하면서 훗날 글로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도움말을 해준 이는 출판사 푸른역사의 박혜숙 대표다. 평생 좋은 역사책을 출간해서 도와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마치 과외공부 시켜주듯 한국전쟁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가 있는 포인트들을 집약해서 안내해줬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나침반을 줬고, 이제 부족한 글을 올해 안에 단행본으로 엮어주기로 했으니 누구보다 크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

글을 내주다시피한 경우도 있다. 독립운동사를 찾아다닌 인연으로 알게 된 허원님의 부친인 허술 선생님은 자신이 보관하던 귀한 수기 자료를 내줬다. 그것이 이 글의 13화 북한의 건국과 허씨 삼부자 편과 16화 인민군 세 청년 이야기로 정리됐다. 선친의 기록을 정리한 글을 내준 남명애님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와 같다.

내가 답사여행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특히 남도 일대를 답사 다닐 때 많은 도움말을 해주고 역사 선생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노영기 조선대 교수, 대전전투와 골령골 학살에 관해 도움말뿐 아니라 현장까지 일일이 안내해 준 임재근 박사와 정성일 실장 두 분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다.

노영기 선생님윤태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박종상 박사 덕분에 내가 한국전쟁에 접근하는 시각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었다. 장사상륙작전의 경우 그의 논문을 요약한 것에 가깝다. 그는 '다정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도 인상이 깊게 남는다. 나는 한국전쟁에 관한 지식과 정보 가운데 한국전쟁 개별 전투의 기록은 군사편찬연구소의 과 <한 권으로 읽는 6.25전쟁>을 기반으로 했다. 내가 세금은 냈다지만, 그 세금으로 이런 두툼한 자료로 정리해뒀으니 고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내가 앞서서 출간한 <중국에서 읽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특히 한국전쟁의 사진 자료에 대해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유임하 한국체육대학 교양학부 교수는 이태준을 중심으로 해방기의 문학에 대해 백지보다 무지한 내게 많은 도움말을 줬다.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시간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풍성한 지식에 맛있는 점심까지 대접해 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풍객이란 닉네임을 쓰는 김영민 선생은 포천군 양문리의 답사현장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집안이 겪은 한국전쟁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책으로 읽는 역사와는 다른 생생하게 피 흘리는 역사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사에 이어 한국전쟁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지식과 정보로 크게 기대면서 직접 대면한 적도 없는 책 속의 선생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휴전협상에 관해 다섯 편의 글은 상당 부분이 역사학자 김보영의 <전쟁과 휴전>(한양대학교 출판부)을 요약하다시피 한 것이다. 김보영 박사는 휴전협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고 후속 연구를 계속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김보영 박사에게는 따로 연락을 취해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으나 이곳에 다시 감사의 뜻을 적어둔다.

박찬승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인터넷 강의를 통해서 해방기를 잘 이해하게 도와줬다. 지금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종종 배우는 나의 역사 선생님이다. 부실한 늙다리 학생에 지나지 않지만 학생의 마음으로 감사의 말씀을 남긴다.

길윤형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은 조금 특별한 경우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됐지만 그의 <26일 동안의 광복>은 일제 패망 직후의 상황을 이해하는 길잡이였다. 여운형을 비롯한 몇 편의 글은 그의 노력과 필력에 기댄 바가 크다.

김태우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따로 연락한 바는 없지만 <폭격>에서 책 속의 치밀한 선생님이었다.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주제를 연구하여 그것을 책으로 펴낸 <조선인민군>의 김선호 박사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남긴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님의 <손님>은 특별한 역사서다. 황해도 신천에서의 학살이라는 사건을 소설이란 포맷 속에 역사기록으로 담아냈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내 글에 담았다. 아직 만나 보진 못했으나 사람의 인연이 가까이 닿아 있다. 조만간 나의 여행 동지인 화가 윤지원을 찾아가면 자동적으로 만나게 되는 될 것이니 나는 군산행을 기대하고 있다.

김재웅 박사 역시 좋은 저술을 통해 책 속의 선생님이 되어 주셨다. 메신저로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겼으나 이곳에 다시한번 감사의 뜻을 새겨둔다.

끝으로 나의 부족한 글을 매체에 실어주고, 한 편 한 편 글이 어긋나지 않게 보살펴 주고, 독자들을 위해 보기 좋게 편집하고, 특히나 내가 좋아해서 매번 삽입하는 지도를 번거롭다는 불편 한 마디 없이 멋지게 그려준 <오마이뉴스> 편집부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제 긴 글을 끝낸다. 뭔가를 끝내는 홀가분함이 없지 않으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니 더욱더 거칠어지는 '한국전쟁'에 마음은 몹시 불편하다. 이와는 별개로, 앞으로 다시는 내 역량에 넘치는 글쓰기에 서성거리지 않고 오직 길 위의 행자(行者)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이 글에 관련된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끝낸다.

임진각 북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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