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2 20:54최종 업데이트 25.03.22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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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인 1530년에 조정 간행물로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제38권에서 전라도 소속 제주섬의 풍속을 스케치한다. "사투리가 난삽하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 "그물을 쓰지 않는다", "돌을 모아서 담을 쌓는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등등과 함께 "음사를 숭상한다(尙淫祀)"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 사람들의 신앙을 '음사'라는 부정적 용어로 표현한 것은 이 신앙이 군주의 공인을 받지 않았다는 관념을 반영한다. 군주의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여타의 신앙을 금지하거나 폄하하던 왕조시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조정 간행물에 "음사를 숭상한다"고 적혔을 정도로 제주에는 신들이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은 "산과 숲, 내와 못, 높고 낮은 언덕, 나무와 돌에다가 모두 신의 제사를 지낸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깃발을 함께 받들고 경전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한다", "2월 초하룻날 귀덕·금녕 등지에서는 나무장대 열 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봄가을에 남녀가 광양당과 자귀당에 무리로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지낸다", "뱀·독사·지네가 많은데 만일 회색 뱀을 보면 자귀의 신이라 하여 죽이지 말라고 금한다" 등등으로 묘사한다.

제주에 신들이 많아진 데는 자연환경의 영향도 컸다. <제주도 연구> 제44집(2015년)에 실린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의 논문 '기후환경적 측면에서 본 제주 민간신앙'은 이렇게 설명한다.

"제주섬은 온대와 아열대의 전이지대에 있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바람이 강하고 비가 많으며 가뭄이 심한 삼재(三災)의 섬이라 불릴 만큼 재해가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해안지대에는 일년 내내 미생물 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역이 미비하던 시절엔 질병 위험이 상존했는데, 대부분 민간신앙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조천리 만세동산에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김장환

<제주항일인사실기>에 실린 김장환의 사진.북제주군·북제주문화원

이런 특성은 제주섬의 항일투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섬의 신들이 시위 현장으로 불려 나오는 배경이 됐다. 중등학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장환(金章煥) 등의 항일운동을 소개하는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3권은 "제주도의 3·1독립운동은 먼저 신좌면 조천리에서 일어났다"라고 한 뒤 이곳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본격적 행동에 나서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들은 조천리에서 좀 떨어진 산중 미밑동산에 들어가 사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하고 산 이름을 만세동산이라 하며 여기서 모든 계획을 토의·진행하면서 3월 2일(21일의 오기)을 기하여 크게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제주도 북쪽 해안가에 사는 김장환 등이 맹세 의식을 거행한 미밑동산(미밋동산)은 미모치동산으로도 불렸다. 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4권은 김장환과 더불어 이 운동을 주도한 고재륜(1899~1980)에 관한 대목에서 미모치(味毛峙)의 또 다른 이름이 '미밑동산'이었다고 알려준다.

조천리 사람들은 우리말 '미밑'이나 '미밋'을 이두로 표기하기 위해 '미모치'라는 한자를 차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이두 용법을 감안하면, 이곳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미모치라고 표기하고 미밑이나 미밋으로 발음하는 약속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미밑동산에서 결의를 다진 것은 마을 수호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한라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였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1집(2020년)에 수록된 김황재 제주항일역사연구원장의 논문 '제주도 조천만세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는 소형 사화산인 오름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조천리는 오름이라는 제주도 특유의 작은 봉우리를 끼고 있는 대다수 마을과 달리 비교적 평탄한 분지형 지형을 띠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은 미모치인데 풍수적으로 성산(聖山) 한라산의 정기가 맥을 타고 흘러 마을 동쪽 끝에 이르러 우뚝 솟은 형국으로 자리하여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堂)이 있어 주민들은 이곳을 성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터졌다는 뉴스를 들은 이 지역 유지들과 기독교 목사들 사이에서 만세운동의 기운이 일어났다. 이 분위기에 박차를 가한 인물이 김장환이다. 북제주군과 북제주문화원이 발간한 <제주항일인사실기>는 1902년 태생인 그가 "선각자 김시학의 장남으로 조천읍 조천리 2663번지에서 태어나 서울에 유학,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고 알려준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김장환은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3월 15일 목포로 도피한 뒤 다음 날 조천리로 귀환했다. 이때 그의 몸에는 독립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고 <제주항일인사실기>는 말한다. 그 이후 상황을 위의 <독립운동사> 제3권은 이렇게 기술한다.

"장환의 백부 김시우는 제주도 내에서도 이름 높은 유학자요 또 지사였는데, 장환이 귀향하여 서울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자세히 전하자 분연히 '우리도 대한민족이다. 독립운동에 결사 진력해보자'고 하며 조카 장환과 함께 선두에 서서 연락을 취하여 아래와 같은 동지들을 얻었다.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영배·김연배·황진식·김찬용·백응선·김운배·박두규·이문천·윤계진·김경희·김필달."

조천리 사람들은 미밑동산에서 항일투쟁을 서약한 뒤 이곳을 만세동산으로 개칭했다. 한라산의 정기가 이곳 동산에 도달해 만세운동의 기운이 응집되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드는 지명 변경이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시위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듯이 1919년 만세시위는 불특정 다수가 모여드는 장터에서 많이 발생했다. 그런데 제주도 3·1운동의 출발점인 조천리 시위는 장터가 아닌 미밑동산에서 시작됐다. 이곳이 시위대의 집결지였다. <독립운동사>의 서술이다.

"21일 오후 김시범·김시은·고재륜 등 동맹한 동지들은 물론 인근의 주민과 서당 생도 등 약 5백~6백 명의 인원이 조천리 만세동산으로 모였다. 김시범이 큰 태극기를 만세동산 마루에 세우고 목메인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노인·청년·소년 할 것 없이 모두 감격하였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고 김장환이 앞에 나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모두들 감격의 만세성(聲)을 올렸다. 그리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큰 길로 나섰는데, 달려온 일제의 수10명 무장대에 의하여 군중은 해산되고 김시범 외 12명이 적측에 검속당하였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올려다본 한라산 정상.성낙선

<동국여지승람>에 "남녀 무당이 신의 깃발을 함께 받들고 경전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한다"는 구절이 있다. 김시범이 태극기를 동산에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김장환의 만세 소리와 함께 일제 침략자를 내쫓는 시위가 시작됐다. 21일의 이 시위가 마을 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과 비슷한 양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귀신 쫓는 놀이와 비슷했던 셈이다.

시위는 22일에도 이어졌다. 대한독립 만세에 이어 '구속자 석방'이 구호로 추가됐다. 23일에는 여성과 아동이 중심이 된 2백여 명의의 진압군과 몸싸움을 벌였다. 음력 2월 23일인 양력 3월 24일은 조천리 장날이었다. 이날은 조천리 장터에서 '귀신 쫓는 놀이'가 벌어졌다. "이날은 조천리 외에도 섬 안 여러 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독립운동사>는 기술한다.

어선에서도 항일 시위한 제주도민들

이때부터 제주섬 곳곳에서는 가슴 찡한 일들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태극기가 아닌 등불을 들고 밤중에 조용히 행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물러가라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몰려 나왔던 것이다.

전두환 반대 시위인 1987년 6월항쟁 때 자동차 운전자들의 경적 시위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19년 3월 하순의 제주 남부 서귀포에서는 자동차 대신 어선들이 항일시위의 도구로 활용됐다. <독립운동사>는 "서귀포 등 일부 해상에서는 어선에서도 태극기가 휘날리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라고 알려준다. 한라산 정기를 타고 흘러나와 미밑동산에서 우뚝 일어선 신들의 기운이 이 섬을 이렇게 만들었다.

3월 21일 체포된 김장환은 1심에서 징역 1년, 2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았다. 1999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고재륜은 징역 6개월을 받았다. 보훈부의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지만, 조천리 만세시위의 주역인 김장환은 그 뒤 동아일보사 기자로 살면서 항일운동에 관여했다.

<제주항일인사실기>는 조천리 시위의 핵심 인물들이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결성했고, 이 단체가 고문 피해자 추모 활동 등을 벌였다고 알려준다. 1925년에 조천리 출신들은 서울에서 '경성부근 청년단체연합회 기성회'를 조직했다. 김장환은 기성위원 19명의 1인이 됐다.

김장환은 1944년에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평양 여성 김혜원과 재혼하기 위해서였다고 <제주항일인사실기>는 말한다. 그 이듬해에 한반도가 분단되고 그는 평양에서 발이 묶였다. 3·1운동 때는 고향으로 귀환해 맹활약했던 그는 8·15 해방 뒤에는 그런 귀환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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