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촬영한 자유의 여신상
위키미디어 공용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로 향하는 유럽 이민자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 중 하나는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가 짊어진 무게와 질곡을 뒤로하고, 무한한 자유를 꿈꾸며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 이들에게 이 거대한 동상은 그들의 염원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18세기 프랑스는 공화정을 향한 갈망과 왕정복고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권위주의를 동경하는 관성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이어가며 지친 프랑스 민주주의 앞에, 미국은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 동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열렬한 공화주의 신봉자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레(Édouard René de Laboulaye)는 프랑스 시민들의 공화주의적 열정을 한데 모아, 미국에 의미 있는 선물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유의 여신상이다.
처음에는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같은 대형 아치도 고려됐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큰 공헌을 한 라파예트(Gilber du Motier de La Fayette) 장군의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자유를 영원히 상징할 형상을 고대 문명에서 찾고자 했다.
고대 로마 공화정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울 때, 그들의 정신을 지탱한 것은 바로 리베르타스(Libertas) 여신이었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 속 마리안느 여신 또한, 리베르타스의 이상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존재였다.
이렇게 뉴욕의 관문을 지키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유럽 민주주의의 역사를 담아 미래의 민주주의를 수호해달라는 프랑스인의 염원을 미국에 전한, 시대를 초월한 표상이었다. 바르톨디(Auguste Bartholdi)의 이 작품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며 민주주의와 자유 그 자체를 대변하는 영원한 상징이 됐다.
풍자적 비판에 대응하는 모습

▲11일(현지시간)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에서 라파엘 글뤽스만 의원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프랑스의 한 유럽의회 의원이 연설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언급한 것이 미국 백악관을 자극한 듯하다. 중도좌파 정당인 '공공 광장'(Place publique) 소속 라파엘 글뤽스만(Raphaël Glucksmann) 의원은 지난 16일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재자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미국인들, 과학의 자유를 지켰다는 이유로 연구자들을 해고하는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돌려주세요. 우리는 그것을 선물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경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차라리 여기(프랑스)에서 더 잘 보관하겠습니다."
다음 날인 17일 미국 백악관 대변인 캐롤라인 레빗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의 여신상을 반환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말에 "절대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고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그 이름 없는 프랑스 하급 정치인에게 충고하자면, 프랑스인들이 지금 독일어를 쓰지 않는 것은 오직 미국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 위대한 나라에 매우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위대한 나라에 매우 감사해야 한다'는 표현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너무나 자주 들은 익숙한 레토릭이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지도자' 급의 수사적 표현에는 여전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도 사실이다.
풍자적 비판에 대응하는 모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풍자의 문학적 알레고리를 읽고 그 속에 담긴 은유나 함의를 이해하며 정교하게 응수하는 방식과, 그 말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방식이다.
가능하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첫 번째 방식을 선호할 것 같다. 두 번째 방식을 취하는 사람은 아마도 무언가에 단단히 얽매여 과하게 예민해졌거나, 풍자 속 문학적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정색하고 반박하는 경우일 것이다. 즉 의도적으로 무례하거나, 의도치 않게 무지하거나.
정황상 준비된 답변으로 보이는 백악관 대변인의 말은 우선 격부터 맞지 않았다. 외국의 한 의원이 대중 연설에서 한 발언에 대해 "이름 없는 프랑스 하급 정치인" 운운하면서 조롱조로 대응하는 것이 백악관이 할 일이었을까? 오히려 백악관이 역으로 조롱당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까?
우방들로부터 조롱의 대상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백악관의 이런 반응에 대해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OSS 117과 유치원 수업의 중간 어디쯤 되는 수준"이라고 촌평했다.
OSS 117은 원래 첩보물을 다룬 TV 시리즈였다가 최근 패러디 코미디로 재탄생한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스파이지만 오만하고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은 유능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멍청하고 시대착오적인 캐릭터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미국은 이 캐릭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까운 우방들로부터 점점 조롱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해프닝이 단순한 외교적 실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본질적으로 조급하다. 자신들이 구축한 국가 정체성과 권위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시간이 걸려도 토론과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반면, 파시즘 체계는 역사적 견고함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이 제기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반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성급한 반응 때문에 논리적 오류와 자기모순에 빠지며 결국 체제의 불안정성을 스스로 드러낸다.
파시스트 정권들은 언제나 국가의 운명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 시민들에게 '우리를 비판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메시지를 주입한다. 이번 백악관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정권이 자유를 지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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